기업 협박 … 복직 로비 … 검은 거래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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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국가안전기획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 유출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불법 도청을 전담한 '미림' 팀장 공운영(58)씨의 자술서 때문이다.

자술서를 통해 공씨가 빼돌린 도청 자료가 이권을 노린 재미동포 사업가 박인회(58)씨에게 넘어간 뒤 삼성에 협박용으로 악용되는가 하면, 중앙일보와 마찰을 빚고 있던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도 보고된 사실이 26일 확인됐다. 이번 사건은 공씨가 불법으로 도청한 내용을 안기부 퇴사 뒤 복직 대비 등을 위해 불법 보관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 불법 도청 테이프가 삼성그룹 인사들을 알고 지낸다고 주장하던 재미동포 박씨에게 건네지면서 대형 사건의 불씨가 지펴졌다.

재미동포 박씨는 삼성그룹에 거액을 요구하며 도청 테이프를 내밀었다. 그러나 삼성이 국정원에 신고하는 바람에 파렴치한 갈취 행각은 일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도청 테이프는 박씨를 통해 MBC로 넘어갔다. 박씨는 이날 MBC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에 돈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삼성 관계자는 "박씨가 찾아온 이유는 금품 갈취를 위한 것이었다. 6억원을 요구했다"고 반박했다.

◆ 미림팀 운영=각계 인사에 대한 도청은 공씨가 안기부 시절 대공정책실 정보관으로 근무하던 중 1992년 미림팀장으로 임명되면서 본격화됐다.

공씨는 미림 업무를 과학화시키라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일부 인원을 직접 선발, 훈련 교육한 뒤 본격 도청 업무를 시작했다는 것. 이후 YS당선과 함께 팀 활동을 중지했다가 94년에 또다시 미림팀을 재구성해 도청 업무를 재개했으나 DJ 정권으로 바뀌면서 공씨가 직권 면직되어 중단됐다.

◆ 밀반출 과정=공씨의 도청문건 밀반출은 미림팀 재구성 과정에서 겪었던 도태에 대한 불안감과 조직에 대한 배신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공씨는 팀 활동이 중지됐던 시기에 무보직 상태로 있다가 팀장에서 평직원으로 사실상 좌천돼 보직이 바뀌었고, 또다시 미림팀 재구성을 지시받고 '언젠가는 다시 도태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중요 내용을 은밀하게 보관하다 밀반출했다고 밝혔다. 공씨는 자신의 예상대로 DJ 정권으로 바뀌면서 일방적으로 직권 면직됐다. 공씨는 자술서에서 퇴직당한 심정을 "너도 나도 마치 자기들에게 똥물이라도 튈까봐 아니면 나를 도태시킴으로써 나에 대한 불씨를 아예 없애 버리려는 분위기가 역겹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직에 대한 심한 배신감마저 갖게 하였다"고 조직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

◆ 재미동포의 은밀한 제의=퇴직 후 참담한 심정으로 지내던 공씨에게 한때 직장동료였던 A씨(58)가 솔깃한 제안을 하며 박인회씨를 소개했다. "박씨가 마침 삼성 측에 사업과 관련해 협조받을 일이 있으니 보관 중인 문건 중 삼성과 관련이 있는 문건 몇 건만 잠시 빌려주면 (A씨의) 복직과 공씨의 영업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이에 공씨는 박씨에게 (문건 또는 테이프를) 전달했다. 하지만 삼성과의 협상은 실패했고 공씨는 물건들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수개월 뒤 국정원 감찰실 요원들이 찾아와 자신이 유출한 도청 테이프 200여 개와 문건 반납을 요구해 돌려줬다고 한다. 그것이 끝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다시 몇 개월 뒤 국정원 감찰실 요원들이 찾아왔을 때 공씨는 박씨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게 공씨의 주장이다. 감찰실 요원들이 "삼성 측과 어떤 사건이 있었느냐"고 추궁했던 것. 공씨는 그제야 박씨가 도청 테이프 복사본을 갖고 삼성 측을 다시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격분한 공씨는 박씨에게 '사기꾼'이라는 격한 말까지 써 가며 항의 겸 설득을 했다고 한다. 공씨는 결국 여비와 미국행 항공권을 사 주고서야 박씨를 미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 대를 이은 협박 행각=그로부터 5년 뒤. 공씨는 이번엔 박씨의 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실제로 공씨는 전 직장동료 A씨로부터 "징그러운 박씨의 아들이 찾아와 '아버지가 찾아가면 잘 대접해 줄 것이라고 해서 왔다. 이렇게 문전박대할 수가 있느냐. 가만 안 있겠다'고 하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공씨는 "박씨가 또다시 문제를 촉발시키려는 의도를 감지했고 최근 (언론보도 등을 통해) 문제가 (엄청나게) 발전하는 것을 보고 '박이로구나'고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박씨는 올 초 아들을 한국으로 보내 언론사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MBC도 접촉 대상이었다. MBC 이상호 기자는 미국으로 건너가 아버지 박씨에게 불법 테이프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협상은 실패했다. 얼마 있지 않아 박씨는 다시 아들을 한국으로 보내 이 기자에게 테이프를 건넨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이 기자가 박씨 측에 1600만원을 줬다는 첩보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기자는 "혹시 몰라 1000만원을 준비했지만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 도청자료 더 있는 듯=공씨는 불법 도청된 자료가 더 있음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주검까지 갖고 가겠다"고 자술서에 적었다. "염려했던 분들이 안도하시겠지만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 참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또 다른 도청 테이프가 세상에 공개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을 사회고위층을 향한 경고 메시지다. "양심에 손을 얹고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기 바란다"고 했다.

하재식.임장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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