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영일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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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몸이 죽고 죽어/일백번 고쳐죽어/백골이 진토되어/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가실줄이 있으랴.
시비선악(시비선악)이 온통 뒤섞여 거센 탁류로 흐르는 난세, 포은 정몽주의 이「단심가」한편은 한줄기 청정한 샘물이다.
삼복 불볕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다 얼음장같은 찬물에 뛰어드는 각성의 소스라침마저 느끼게 된다.
백골이 진토가 되어도 가실줄이 없는 단심, 이 순일한 양심의 선언이야말로 5천년 역사를 지탱해온 한족의 맥이랄 수 있다.
영일정씨는 한족의 양심을 대표하는 큰 조상의 후예임을 긍지로 삼고 8백여년 역사를 이어온다.
시조는 정유명. 고려 의종때의 학자로 시·문에 능해 글이 동문선에 실렸고 벼슬은 은자광진대부추밀원지주사에 이르렀다.

<이름을 세 번 바꿔>
중시조 포은은 습명의 10대손. 시조로부터 선대가 모두 경북영일군에 살아 영일을 본관으로 쓰게 됐다. 영일의 옛 이름을 따라 더러 연일로, 영일에서도 본고장인 오천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정씨라고 쓰기도 했으나 근래 영일정씨로 통일해 쓰고 있다.
전국에 약 2만가구.
포은의, 직계후손인 제1파(원파)부터 8파까지 파가 갈려 서울·경북·경남·강원·황해도 등에 많이 분포해 산다. 발원지가 영일인 까닭에 호남·관서·관북에는 비교적 수가 적다.
근세이전 영일정씨의 역사는 포은과 그 손자인 설곡 정보의 대를 이은「충의」로 대표된다.
「동방이학의 조종」, 5천년 한국사를 대표할만한 충신·효자·의인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는 l337년(고려 충곡왕6년)경북영천에서 났다.
비범한 인물에는 비범한 일화가 전하게 마련인데 그의 이름에 사연이 전한다.
그는 펑생 이름을 3번 바꾸었다. 모두가 꿈 때문.
첫번째 아명은 몽난. 그를 낳기 사흘전 어머니 이씨가 난초화분을 안는 꿈을 꾼 연유에서였다.
몽난이 아홉살 되던 해 그의 어머니는 대낮에 물레질을 하다 깜빡 졸며 집뜰 배나무 위에서 검은 용이 웃고있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어 배나무를 쳐다본 이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몽난이가 배나무 위에서 꿈속의 용처럼 웃고있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정원근은 얘기를 듣고 아들의 이름을 몽룡이라고 고쳤다.
몽룡이 18살 되던 어느 날 새벽 이번엔 아버지 원근이 꿈을 꾸었다.
중국의 옛 현인 주공이 나타나 몽룡을 가리키며『후세에까지 명성을 빛나게 할 아이이니 잘 키우라』는 부탁을 하는 꿈이었다.
원근은 아들의 이름을 다시 주공의 주자를 따 몽주라고 고쳤다는 것이다.
이「비범한 아이」는 나면서부터 또 어깨에 북두칠성처럼 검은점 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들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어깨엔 북두칠성>
9살때 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하자 몽난소년은 그 자리서『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 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상 변치 않습니다』고 써주었다. 단10자의 한시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9살 소년의 재능에 글방스승도 혀를 내돌렸다고 한다.
그는 또 대단한 효자로 전해진다.
19살에 아버지를 여의자 3일 동안이나 물 한모금 마시지지 않고 통곡했으며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이나 무덤을 지키면서 상식을 올렸다.
그의 효도는 인근마을은 물론 조정에까지 전해저 공민왕은 그의 집에 정표를 세워주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하는 것이나 3년 시묘가 요즘 안목으로 보면 효의 기준으로 적합치 않은 느낌이지만 부모를 모시는 지극한 정성으로 새겨야 할 것이다.
24살에 과거에 급제, 예문관검열로 벼슬길에 나선 그는 56세로 일생을 마칠때까지 3O여년간 기우는 고려왕조를 붙들어 세우고 민생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외교에도 뛰어난 수완을 보여 명·왜에 여러차례 사신으로가 원·명 교체기의 긴박한 국제정세속에 고려의 위치를 확보하고 우호관계를 다지는데 기여했다.
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에 힘썼는가 하면 의창을 설치, 빈민구호에 힘썼다. 문신이면서도 1380년엔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격파하는 등 국방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정말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것은 유능한 관리, 뛰어난 학자로서가 아니라 의의 편에 서서 끝까지 양심을 지키다 죽음으로써 영원히 의를 살린 살신성인의 최후에서다.
고려의 기둥이던 최영장군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실각, 죽자 고려의 운명은 포수의 두 어깨에 걸리게 됐다.
세상은 완연히 이성계의 시대로 휩쓸리고 있었으나 그는 의연히 고려를 붙들었다.

<사후 영의정 추증>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고려조타도, 새 왕조창건을 꿈꾸던 훗날의 조선 태종 이방원은 포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술자리에서 회유했다.
-이런들 어떠하리/저런들 어떠하리/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우리도 이같이 얽혀져/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른바「하여가」로 불리는 권력의 유혹에 포은의 답변은「단심가」였다.
위화군회군후 이성계의 쿠데타 음모가 무르 익어가는 것을 감지하고 포은은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기회를 노리던 중 방원이 먼저 자객을 시켜 개성 선지고에서 정몽주를 암살하니 그때가 1392년(공담왕 4년) 4월4일.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리에 푸른 대가 솟아나 다리이름이 선죽교로 바뀌었다 한다.
그가 죽은 석달 후인 7월 이성계는 마침내 공담왕을 쫓아내고 조선을 개국했다.
고려는 사실상 포은과 함께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의로운 죽음은 더러운 삶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그가 죽은지 불과 9년 그를 죽인 조선의 태종은 정몽주의 관직을 복직시키고 영의정에 추증하는 한편 자손들에게 토지와 벼슬을 내리는 등 민심회유에 나섰다. 일단 왕조를 이룬 그에게는 다시 포은 같은 충신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보는 포은의 손자. 조선왕질의 회유책으로 정씨들은 조선조 태종때부터 조선조를 다시 섬겼다. 보는 비안현이 등 관직을 역임했는데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단종이 쫓겨가는 또 한차례 비극을 만나자 벼슬을 버리고 비분강개하던중 사육신의 반정모의가 터졌다. 이때 보는 수양앞에서『성삼문 등은 의인이니 죽이면 후세에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직언을 했다가 사형의 극형을 받았으나 포은의 후손이라 하여 감형돼 천남단성에 유배당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포은의 순절로 1차 화를 입은 뒤 9년만에 복권돼 벼슬길에 나섰던 정씨들은 불과 20여년만에 또다시 정보의 피화로 조선조의 벼슬과 인연이 멀어졌다.
정씨들은 포은이라는 거인의 후예라는 것과 정이록의 정씨8백년 왕조도창설의 영향으로 조선조에서 이씨왕실의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었다고도 말한다.
때문에 후손들에 토지를 주고 군역을 면제해주는 등 특혜를 베풀면서도 결코 요직에는 두지 않았다는 것.
유일하게 정유성이 우의정으로 정승에 올랐고 2명의 판서가 있으나 오히려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쓰는 가풍이 전해져왔다는 설명이다.
현대의 영일정씨는 8선의원으로 전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정해영씨(대종회회장)와 전주불대사 일영씨 형제, 그리고 전농수산부장관 정소영씨, 10·26직후 계엄사령관이었던 육군대장 정승화씨, 현 육군대장 정호용씨 등이 각계에서 두드러진다.
영일정씨는 최근 1백90년만에 두번째 대동보를 꾸몄다.
대종회장 정해영씨는『언제 어디가 사나 충신의 후예라는 긍지를 갖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영일정씨의 가법』이라고 말했다. <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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