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푸에블로호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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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강에는 미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가 전시돼 있다. 현장에서 이를 바라보는 미국인의 심경은 어떨까. 굴욕감과 분노가 뒤섞인 착잡함 같은 것 아닐까 싶다.

최근 평양을 방문했던 미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의 눈에도 대동강의 푸에블로호는 꽤나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흔히 나타나는 '보이는 것은 다 글감'이라는 강박증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푸에블로호를 보고 칼럼을 썼다.

1968년 1월 23일, 북한에 나포된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는 미 해군으로서는 수치의 상징이다. 미 함정이 평화 시에 외국군에 나포된 것은 미 해군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했으므로 정당한 나포라고 주장했다. 미국은 나포 당시 푸에블로호는 원산항에서 40km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다며 나포 사건은 북한의 군사도발이라고 맞섰다.

사건 직후 린든 존슨 미 대통령 등 백악관 정책 결정자들은 '핵 공격 불사'라는 초강경 대응방침을 세웠다. 핵 항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 앞바다에 출동시킨 데 이어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전투기 360대를 한반도 주변에 배치했다. 전쟁은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나 전쟁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사 공격으로 북한을 응징한다는 것은 억류된 승무원 82명의 생명 포기를 의미했다. 또 하나는 베트남전이었다. 전황이 극도로 악화된 상황에서 또 다른 전쟁을 한반도에서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주일 뒤 미국과 북한은 대등한 자격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10개월간의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미국은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북한에 사과했다. 북한은 승무원 전원을 판문점을 통해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선체는 돌려주지 않았다. 북한의 선전술이 굴러 온 떡을 그냥 두고 볼 리 없었다.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는 98년 은밀히 대동강으로 옮겨져 '공화국의 결속과 위엄'을 상징하는 전리품으로 자리잡았다.

크리스토프는 푸에블로호 사건에서 두 가지 교훈을 끌어냈다. 마음만 먹으면 북한이 얼마든지 핵물질을 국외로 빼돌릴 수 있다는 것이 첫째 교훈이다. 북한은 푸에블로호에 인공기를 달고 화물선으로 위장해 남한 주변의 공해를 9일이나 돌아 대동강까지 끌고 갔다. 정찰위성으로 북한을 손바닥처럼 감시하는 미 정보기관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53m 길이의 큰 배가 움직이는 것도 감지하지 못하면서 자몽만한 플루토늄 덩어리의 밀반출을 막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고 크리스토프는 꼬집었다.

대결보다는 역시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교훈이다. 푸에블로호 사건을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외교협상은 지루할뿐더러 때로 절망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악(次惡)의 최선'은 된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부시 행정부가 진지하고 직접적인 외교를 거부함으로써 북한은 더욱 위험한 나라가 됐다고 크리스토프는 비판한다.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노력은 힘이 들고 좌절감을 주고 종종 불만스럽지만 그래도 미국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다.

1866년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 나타났을 때 조선 관민은 똘똘 뭉쳐 배를 격침시켰다. 그로부터 100여 년 뒤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나포해 제너럴 셔먼호 격침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 바로 옆에 전시했다. 대동강에 푸에블로호가 모습을 드러내던 날 북한의 '노동신문'에는 이런 격문이 실렸다. "미국과 전투를 벌여 19세기에는 셔먼호를, 20세기에는 푸에블로호를 전리품으로 만들었다. 21세기의 전리품도 여기에 가져다 놓으리라."

오늘부터 베이징에서 6자회담이 다시 열린다. 외교협상은 무력을 수반하지 않는 전쟁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체제안보는 6자회담을 통해 북한이 거둘 수 있는 21세기의 전리품이다.

배명복 국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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