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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그러나, 정치개혁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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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노무현 대통령의 편지정치에서 발원한 정치개혁론이 한국 사회를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국정 최고책임자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태어나자마자 애물단지가 된 정치개혁론을 '어용'의 의혹을 무릅쓰고 굳이 인공 부화하려 든다면 무모하게 비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정치의 이해타산을 떠나 공론장, 특히 유력 언론들이 정치개혁론을 사산(死産)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 입헌주의의 완성을 꿈꾸는 헌법학도의 시각에서 한마디 거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다.

정치개혁론이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제안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일 것이다. 국가 권력의 향배를 좌우하는 중요한 어젠다를 무단히 제기하는 것이 다가오는 지방선거나 대선에서 그동안의 실정을 희석시키기 위한 정치 승부사의 노림수라는 분석을 선뜻 물리칠 만큼 집권세력에 대한 대중적 신뢰가 높지 않다. 더구나 연정이니 개헌이니 더 큰 노림수를 미리부터 연계시키니 의혹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진정 사심이 없다면 천지개벽할 거대 논제보다는 선거제도 개혁과 같은 구체적 현안부터 차근차근 풀어갈 일이다.

정치개혁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에는 그 제안이 이뤄진 방법상의 오류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우리 헌법은 국민주권주의의 실현을 국민의 대의기관에 의해 의존하는 간접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략적 이해타산을 떠난 공동체의 항구적 발전을 위한 진지한 제안, 특히 대안적 정치세력의 협조가 필수적인 제안은 국민에게 직접 던져지기보다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을 위해 헌법에 의해 예정된 과정을 거치는 것이 순리다. 주권자인 국민을 무시하고 밀실정치를 하라는 주문이 아니라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에 관한 헌법적 절차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다. 헌법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형성기관으로 정당을 헌법화하고 있고 법치주의의 원리에 바탕해 국정 결정의 시발점을 국회로 삼고 있으므로 정치개혁의 주요 과제는 대통령이 소속한 정당이나 정치적 파트너인 야당을 상대로 직접 제기되고 협의되는 것이 헌법정신에도 부합하고 실현 가능성도 높일 수 있다. 국민의 직접적 의사형성은 정당이나 국회의 공론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렴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정말 필요하다면 연정이나 정책공조도 논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나 절차상의 과오가 실체적으로 정치개혁론을 폐기해야 할 절대적 이유는 될 수 없다. 입헌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해 긴요하다면 누가 어떤 방식으로 제기하든, 또한 단기적 수혜자가 누구이건 반드시 실현돼야만 한다.

이 점에서 정치개혁론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인 경제 지상주의에 바탕한 시기상조론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기 위한 새로운 성장동력의 발화를 위해 전력투구(all in)해야 할 시점에 한가하게 정치개혁이나 논한다는 것이 현실 진단에 둔감한 참여정부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비판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경제가 중요하더라도 정치사회가 경제정책만 붙들고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헌법이 지향하는 경제정책의 건실한 수립과 실현을 위해 정치 시스템의 구조조정은 필요조건이다. 국민의 정당한 의사형성을 저해하는 선거제도와 정당제도 하에서는 올바른 경제.사회.문화 정책을 수립할 수 없다. 모든 악의 근원을 정치로 돌리기 이전에 정치가 올바로 기능할 수 있는 체제를 수립하지 않는다면 소득 2만 달러시대의 선진 한국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북핵 사태를 중심으로 한 대북 관계나 국제 관계 및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치권의 노력 못지않게 그 전제가 되는 정치 시스템의 개혁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적 과제다. 여야 모두 민주화를 더욱 안정시키기 위한 정치제도 개혁에 사심 없이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김종철 연세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