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휴먼북스] 철학의 수컷들의 학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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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유럽 대학에는 이런 말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철학과 강의에 여학생이 들어오는 이유는, 남자들이 뭘 하는지 궁금해서다." 그만큼 철학과 강의실은 남자들의 세계라는 뜻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철학이란 남자들끼리 하는 '재미나는 일'이고, 좀 비꼬아서 말하면 남자들끼리 하는 '이상한 짓'이다.

하긴 남자들끼리 모여 한 잔 하면서 사랑(에로스)과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의 철학(필로소피아)에 대해 토론한 내용을 서술한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에도 등장인물로 여성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디오티마라는 한 여성으로부터 에로스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을 참석자들에게 밝힌다.

이것은 여성이 철학에 관여한 하나의 단초에 지나지 않는다. 마리트 울만을 비롯한 여덟 명의 학자들이 공동집필한 '여성 철학자'(푸른숲)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철학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실존하는 여성철학자들에 대해서 팔백 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에 걸쳐 논하고 있다. "망각된 성취들과 (그에 상응하는) 잘못된 서술들의 목록을 열거하자면 한참 이어질 것이다. 그 목록은 원래 아스파시아가 기초를 만든 '소크라테스적인' 대화에서 시작해… 몽테뉴보다 훨씬 앞서, 최초의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에세이를 쓴 아빌라의 테레사에 이르기까지 철학사 전체에 걸쳐 있다."

의식적으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썼다는 이 '여성철학자들의 역사'는 사실 '철학의 역사'다. 이 점은 저자들도 순간 놓쳤거나 겸손의 마음에서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 책은 기원전 6세기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인간 사고의 핵심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여성 문제'를 포함해서 말이다.

오늘날 학계에 여성의 진출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문학, 사학, 법학 등, 같은 인문 분야 학문에 비해 여성철학자는 그리 늘지 않고 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남녀 구분 없이 철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다. 이 문제 역시 저자들이 다루지 않은 부분이다. 인간 사고의 다양성은 철학적 실존의 문제를 넘어서 인류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여성철학자에 대한 논의는 좀 더 폭넓은 지평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생각하는 남자'일 뿐이다. 이 벌거벗은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괸 남자는 이 세상의 온갖 고뇌를 혼자 짊어지고 있는 듯하다. 누군가 함께 생각한다면 그 사색의 멍에가 좀 더 가벼워지지 않겠는가.

(영산대 교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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