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인사이드피치] 205. 올스타전은 팬과의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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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지금은 없어진 쌍방울 레이더스의 일본 오키나와 전지훈련장에 갔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잠시 헤매다가 외야 쪽 출입구를 찾았다. 운동장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어색해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껐다. 3루 쪽 더그아웃으로 걸어가 김성근 감독을 만났다. 김 감독은 궁금한 것들을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무뚝뚝한 그가 친절히, 그리고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게 의외일 정도로 반가웠다.

"왜 친절히 설명해 주는지 알아요?"

"글쎄요."

"아까, 담배…. 야구장을 어렵게 생각해 주는 거 같아서 기분이 좋았어요."

김 감독은 '인사이드 피치'가 의식하지 못했던 행동을 눈여겨봤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일터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듯한 그 행동에 기분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친절히 설명해 주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속으로 뜨끔했지만 "아, 예"하고 얼버무렸다. 그 다음부터 야구장을 소중하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인사이드 피치에도 야구장은 소중한 일터 아닌가.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 다쓰나미 가즈요시라는 선수가 있다. 그는 훈련이건 경기건 유니폼을 갈아입고 그라운드에 들어서기 전 꼭 모자를 벗어 고개를 숙이고 잠깐 묵념을 한다. 내 젊음을 바치는 그 땅에 감사하고, 존경심을 표현하는 자기만의 의식이다.

메이저 리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루이스 곤살레스는 주말이면 방망이 몇 자루를 교회 한구석에 놔둔다. 그리고 월요일에 그 방망이를 챙겨 운동장에 나간다.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기운이 방망이에 스며들고, 그런 신성한 마음 가짐으로 한 타석 한 타석을 맞이하겠다는 의도다.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성호를 긋고,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는 선수들도 곧잘 볼 수 있다.

19일 후반기를 시작한 국내 프로야구가 시끄럽다. 배영수.박명환.장문석 등 올스타에 뽑히고도 부상을 이유로 불참한 세 명의 선수들에게 한국야구위원회가 세 경기 출전 자제를 요청했고, 이들이 속한 구단이 반발하면서 생긴 잡음이다. 구단은 올스타전 출전보다 정규시즌 한 경기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들이 아무리 부정해도 후반기 첫 경기 컨디션 조절이 어려워 올스타전을 기피했다는 의혹이 짙다.

올스타전은 팬과의 약속이다. 프로선수에게 팬은 경외의 대상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다. 그들과의 약속이라면 뛸 순 없어도 최소한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보여주는 게 직업 의식이요, 소명 의식이다. 구단에서 말려도 선수 스스로 기를 쓰고 나가야 했고, 선수가 기피하면 구단이 야단쳐서라도 내보내는 게 옳다. 자신이 속한 곳을 하찮게 여기면 자신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는 건가.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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