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돈 86억 원 유용한 김상기 씨|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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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시중은행 1개 지점 차장으로 있으면서 기업 군을 거느렸고 불 우 소년 뒷바라지에서 사회사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펴 칭송만 받던 김상기씨(39)는 결국 두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적인 인물이었다.
무명선수였던 김태식 선수를 후원, WBA 챔피언으로 만드는가 하면 김태식이 개런티로 받은 6천3백 만원까지 꿀꺽 삼키기도 했다.
김씨는 경기도 벽 제에 박애 원이란 정신이상자 요양소를 건립, 사회사업도 했고 원진 프로모션·민예 극장의 숨은 스폰서로도 활약했다.
또 81년 1월부터는 대한체조협회 회장직을 맡아 6천여 만원을 찬조금으로 선뜻 내 놓기도 했다.
그러나 김씨가 지난 4월19일 자살함으로써 김태식 선수 같이 날벼락을 맞은 사람이 곳곳에서 나타나서 김씨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김씨는 자기와 친한 사채업자들에게 은행금리와는 별도의 뒷돈을 주기로 하고 사채를 은행에 끌어들인 뒤 예금주 몰래 예금을 빼내 쓴 것이다.
김씨가 사채업자들에게 지급한 금리는 월 2·5%로 은행금리와의 차액은 처음에는 현금으로 지불했으나 나중에는 자기가 만든 예금통장으로 지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5년간에 걸쳐 무려 86억 원의 돈을 유용했는데도 은행은 물론 예금주도 몰랐던 것은 김씨 자신이 통장을 처리하는 데다 사채업자에게는 꼬박 꼬박 이자를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씨가 자살하기 얼마 전부터는 통장을 직접 만졌던 은행의 대리와 사채업자들 중 일부는 이를 눈치챘으나 이미『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의 수법 중 전형적인 예를 들어보자. 김씨는 사채업자 A씨에게 월2·5%의 이자를 지급키로 하고 10억 원을 3개월 짜리 정기예금으로 예금키로 합의한다.
김씨는 A씨에게 예금수속을 대신해 주겠다며 도장을 받아, A씨 몰래 금액이 적히지 않은 백지예금청구서에 도장을 적어 챙긴다.
이 때 예금원장과 A씨의 통장(물론 가명)에는 10억 원이 정상적으로 기재된다.
얼마 후 김씨는 이미 챙긴 A씨의 도장이 적힌 예금청구서에 10억 원을 적어 빼내 쓴다. 김씨가 직접 통장을 만지는 대리 때는 본인이 이 작업을 했으나 차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대리에게 통장은 내가 회수하겠다』며 인출을 지시했다.
담당대리는 김씨의 요구가 관행에 벗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직속 상관의 지시를 거절할 수가 없다.
게다가 김씨는 전화 한 통으로 수억 원의 돈을 입금시키는『예금유치 왕』이며 부하직원들의 후생문제에도 남다른 신경을 써 온 터였다.
김씨는 A씨 몰래 꺼낸 10억 원을 유용하지만 A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A씨는 매월 김씨로부터 이자를 꼬박 꼬박 받은 데다 3개월 만기(정기예금)가 되면 다시 새 통장으로 바꿔 주기 때문이다.
A씨로서는 정기예금 통장을 가진 데다 월 2·5%의 이자를 꼬박 꼬박 받으니『황금 알 낳는 거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은행에서는 통장발급 등을 엄격히 챙기지만 지점의 2인자가 통장을 하나쯤 더 챙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잘못 기재돼 파기시킨 통장을 몇 개쯤 늘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나중에는 돈이 달리자 뒷돈도 현금으로 주지 않고 예금통장으로 주었다.
이자가 이자를 남는 방법으로 통장에 기재된 액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A씨도 나중에는 이를 눈치챘지만 사채로 뒷돈을 받은 약점 등 이 있어 울며 겨자 먹기였다.
김씨가 5년 동안 4개 지점을 돌아다녔으나 본인이 유치한 사채업자들은 같이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좀처럼 밝히기 어려웠다.
은행원의 치밀한 부정은 적발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김씨의 최종 꿈은 국회의원. 남달리 과시 욕이 강했던 그는 그 꿈을 실현하고 예금주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요란한 사회활동을 해 온 것 같다고 주위사람들은 말했다.
지난 63년 강릉농고를 졸업, 조흥은행에 들어간 김씨는 군입대기간 3년을 빼고 16년간 은행원으로 근무, 차장까지 승진했다.
고교밖에 나오지 않은 김씨가 말단 행원에서 돈을 모아 원진 그룹 창건·사회사업 등을 하게 된 것은 월남전 참전이 계기가 됐다.
명석한 두뇌와 주산실력·영어회화 능력을 갖춘 김씨는 월남전에 참전, 한국인으로서·주월 미군 PX에 근무하는 행운(?)을 얻었다.
남달리 이재에도 밝았던 김씨는 이때 솜씨를 발휘 몇 억대의 거액을 벌어 귀국했다.
김씨는 귀국한 뒤 다시 조흥은행에 들어가 근무했는데 조흥은행 서대문지점 근무 당시 말단행원이면서도 자가용 승용차를 몰아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김씨는 월남에서 번 돈을 특유의 사업수완으로 굴려 70년에는 10억 원이라는 거액의 사업자금을 손에 쥐게 되었다는 것.
김씨는 이 돈으로 77년 원진무역·원진강건·원진바우를 창설, 건립해 왔으며, 81년에는 강원도 동해시의 원진 조선까지 인수, 회장으로 앉았다.
또 원진 프로모션(대표 김규철)의 후원회장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김씨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설문리701 박애원(총무 박춘식)을 77년 초 인수, 운영했는데 당시 서울 응암동에서 양말공장을 경영하던 김씨는 대지 4천 평의 박애 원을 부인 신문자씨 이름으로 매입, 그곳에 양말공장을 지으려 했다.
당시 원장이던 박춘식 목사가 이틀 밤을 김씨 집에 묵으면서『오갈 데 없는 불쌍한 정신질환 환자들을 도와 달라』고 눈물어린 호소를 하자 김씨는 공장을 짓지 않고 이를 오히려 지원했다.
이사장으로 취임한 김씨는79년 말 건물내부수리비 명목으로 2백 만원을 내놓고 작년 10월부터 지난 2월까지 매달 임원들의 월급보조금으로 50만원씩을 지원했다.
김씨는 은행원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박애 원을 제외한 어떤 기업에도 등기부상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원진 그룹 건물은 모두 부인 신문자씨 소유로 하는 등 공식적인 직함은 조흥 은행원이었을 뿐 원진 그룹 건물은 80년 신문자씨가 원진무역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마쳐 김씨가 자살했을 때 김씨의 재산은 연수동 집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것도 2중, 3중으로 은행에 저당 잡혀 한 푼도 안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원진 그룹은 지난해 8월부터 부회장으로 취임한 김규배씨(57)가 금년 2월1일부터 경영권을 장악, 운영해 왔으나 껍데기뿐인 회사에 취미를 잃고 지금은 아예 손을 뗐으며 원진 그룹은 사원들이 주인이 돼 신기영씨를 중심으로 맥을 잇고 있다.
원진무역 전무 이용성씨는『우리는 피해자다. 직원들의 집이 모두 은행대출담보로 저당 잡혀 알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일할 뿐』이라면서『김씨에게 철저히 당했다』고 말했다.
이씨는『지금까지 원진무역이 한번도 자금이 넉넉하지 못했는데 경영주였던 김씨가 이 같은 사정은 아랑곳없이 그같이 많은 돈을 어디에다 썼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태식 선수의 6천3백 만원 외에 언론인 오 모 씨도 김씨를 믿고 집을 대출담보용으로 저당 잡혔다가 날리게 됐으며 모 사채업자는 30억 원을 김씨에게 물리기도 했다.
김씨의 사회적인 지명도를 믿고 돈을 맡겼다가 때인 사람은 이밖에도 수없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그 많은 돈을 어디다 썼을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씨는 죽고 돈 받은 사람도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는 국회의원이 꿈이었던 김씨가 지나친 과시 욕으로 사회단체·불우 소년·권투 계의 대부노릇·민예 극장 스폰서 노릇을 하느라고 상당액의 자금을 뿌린 것은 사실이나 기업경영실패를 첫째 이유로 꼽고 있다. <박병석·이석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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