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0)<제 77화>사각의 혈투 60년(38)|김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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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방 전 한국인 복서들의 활동무대는 중국에도 있었다.
인종 박람회장을 방불케 하던 국제도시 상해였다. 이 곳에는 일본인·중국인·한국인뿐만 아니라 미국·필리핀·독일 등 전세계 각국에서 유명·무명의 복서들이 모여들었고 국적 불명의 괴한(?)들도 들끓었다.
이 상해의 링 계를 주름잡은 세력중의 하나가 코리언 트리오(3명의 한인)이었다.
그들의 성씨가 공교롭게도 모두 박씨이므로「상하이의 박 트리오」가 인기를 끌었다. 이들 외에도 상해엔 해방직전 정복수가 원정 가고 송방헌도 잠시 활약했으며 김계윤도 여기서 복싱의 기초를 닦았다.
박 트리오란 박순철·박형권·박제건이다.
이중 가장 먼저 상해에 진출한 것은 박제건.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였던 박제건은 키가 1백72㎝로 경량급으로선 비교적 장신인데다 눈이 빠르고 스탭이 좋아 교묘한 득점위주로 경기를 풀어 나가는 것이 특징이었다.
부평출신인 박제건은 항일투사로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의 망명길에 따라나서 상해로 갔다.
상해에선 정규학교에 다니는 등(그래서 영어가 유창했다)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복싱에 취미를 붙여 배우다가 링에까지 올라갔다.
재키 박이란 별명을 이때 만들었고 해방후엔 심판으로 많은 활약을 했다.
박형권은 원산에서 아마추어 복서로 활약하다 서울 만주를 거쳐 상해로 갔다.
그가 상해에 간 것은 43년께이며 따라서 상해에서 많은 활동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웰더급 선수로서 위력 있는 펀치에다 정복수와 비슷한 파이터였던 박형권은 특유의 파괴적인 대시로 4, 5차례의 경기를 모두 KO승으로 장식, 한창 줏가가 오를 즈음 해방이 되어 귀국했다.
박형권은 해방 후 정복수 송방헌과 함께 동양의 3대 권투왕으로 불리며 정상급의 철권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으나 정복수의 그늘에 가려 끝내 제1위가 되지는 못했다.
박형권도 정복수와 같이 말년을 술로 어지럽히고 말았다.
실향의 외톨박이인 고독 탓도 있지만 너무나 많이 얻어맞는 복서의 일반적인 경향을 벗어나지 못해 한번의 시합으로 몇 푼의 돈만 생기면 술값으로 다 날려버리기 일쑤였다.
재키 박이-영어실력이 무기가 되었지만-6·25후 미군상대의 장사에 성공, 생활을 즐긴 것과 퍽 대조를 보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박형권은 세상을 뜰 때까지 서울 불광동의 무의탁자 보호소 신세를 져야했다.
상해거리를 가장 위세 좋게 흔들었던「주먹」은 박순철이었다. 그는 「나까노」란 일본식 링네임을 썼고 또 한국인 사이에선 「샹하이 박」이란 별명이 통했다.
사실 박순철은 권투를 직업으로 하는 엄밀한 의미의 프로복서는 아니었다.
장안의 깡패두목 김기환이 그랬듯이 박순철은 원래 상해 뒷거리의 보스 중 하나였다.
충남 당진 출신인 박순철은 10살을 갓 넘었을 때 찢어질듯 가난했던 집을 뛰쳐나와 인천에서 맨 주먹으로 살길을 개척했다. 이 집 저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소년시절을 보낸 박순철은 나이 20에 이르자 외항선이 드나드는 항도 인천에서 주먹세계의 생리를 익히게 되었고 스스로 부두의 무서운 청년으로 변모했다. 「큰 뜻」을 품은 박순철은 상해를 동경하게 되었고 주저할 필요 없이 이 국제 도시로 뛰어들었다.
온갖 세파를 다 겪은 데다 천성이 보스기질인 박순철은 상해에 발을 붙이자마자 조직의 머리가 되었다
복싱계로의 투신은 그후가 된다. 그러니까 박순철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프로복서가 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사업」에 유리한 영향을 주기 위해 링을 이용한 것이다. 합법적인 명성을 얻자는 것이었다.
그의 사업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정의요, 실력만이 최고가치였던 아귀다툼의 상해에서 크게 성공, 비범한 인물로 국내에까지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박순철은 해방이 되고 귀국해서도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재능을 십분 발휘, 60년대까지 프로복싱단체의 주역(한국권투위원회 사무국장 등)으로 활약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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