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의 뿌리 밀치고 찬연한 금자탑 세운 신사임당…그 슬기 되새기는 5월이고 싶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5월은 가정의 달이라 하여 가정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화행사가 빈번한 달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모 여성단체가 수년 째 벌여오고 있는 「신사임당제」에서는 매년 사임당에 버금가는(?) 여성을 뽑아 그 해의 「사임당」으로 공개하는 것 같다.
그 많은 사임당의 후예들이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 역사상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대표적인 여성 한 사람을 말하라하면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로 귀결하는 대는 변함 없는 것 같다.
한사람의 뛰어난 인격자이면서 덕망이 높고 어진 어머니이면서 효심이 지극했으며, 시문과 서예에 능했고 교육자·현부인·학자·화가 등 온갖 당대의 재예를 한 몸에 지녔던 사임당 신씨가 살았던 시대는 오늘날과 같은「여성상위시대」가 아니었다. 당대는 뿌리깊은 유교의 봉건주의 사회였으므로 그 시대가 허용하는 여자의 위치란 고작 바느질과 집안 일, 허드렛일이 천직처럼 여겨졌으며 혹시 문학이나 예술에 재질이 빼어난 여자라 하더라도 짐짓 그 재질을 내버리지 않고는 뒷감당을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당대를 풍미한 사임당의 재예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만일 그녀로 하여금 그야말로 자유로운 현대적 분위기 속에 두었던들 필연 절세의 대가가 되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고 주장한 이은상 선생의 말을 듣는 현대 여성들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남달리 유복한 유년을 보냈지만 그 유복함이 교만에 흐르지 않고 향기의 밑천이 되었으며, 출가해서는 친정과 시가를 오가며 전전긍긍해야 했지만 구차스러움에 물들지 않고 뼛속까지 울리는 저 「은친가」를 지어 드넓은 인간애와 대쪽같은 삶의 정기를 잘 조화시킬 줄 알았던 여성, 그녀를 통하여 누대의 스승 율곡이 탄생되었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사임당을 떠올리면 현대 여성은 아무도 「조건운운」할 계제가 못된다.
이것은 어떤 불합리한 여성의 불평등을 합리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지난 역사를 통해 볼 때, 또 성인들의 사적을 통해서 볼 때 역시 인간이 인간다움의 빛을 발휘하는 길은 무사 안일이 아니라 불굴의 의지와 고고한 이상을 얼마만큼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느냐에 달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성찰하고 싶다. 신사임당 교육관이 생기고 신사임당제가 열리고 이조의 예법이 간간이 신부교실에서 학습되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학습이 행위의 모방에서 그치는 것이라면 엄격한 의미에서 전통일 수 없다. 왜냐하면 전통이란 그 시대를 풍미했던 정신의 맥을 계승하여 오늘의 새로운 가치차원에로 재창조되는 재2의 정신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청빈과 절제와 내면적 향기를 통해서 그 막강한 봉건의 뿌리를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밀치고 찬연한 금자탑을 쌓을 수 있었던 몇몇 조선조 여성들의 슬기와 강인함을 찬찬히 되새기는 5월이고 싶다.
이 세계에서 연발하고 있는 악몽의 반절은 여성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문득 몇 년 전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가 여성학 강좌에서 한말이 떠오른다. 그는 대다수의 조선 여성이 가권 혹은 경제권으로부터의 자격을 부여받지 못해 억압적 삶을 탈피하지 못했다면 현대(70년대)여성은 자아확립으로부터 자기 아이텐티티를 찾지 못하고 오히려 조선여성보다 더 내면적 갈등을 겪고 있다는 조사결과를 진술했다. 교육이나 환경변화 이전에 무엇인가가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견해가 전제되어 있는 말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