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악의 흥에 산다|서울 마포구 아현 3동 이광수씨 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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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꽹과리·장고·북·징>
꽹과리를 선두로 장고·북·징·날라리의 합주가 시작되면 어느 새 잠자던 신명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인간의 원초적인 흥을 유발시키는 우리의 농악은 생명의 근원에서 흘러 넘치는 힘, 한을 흥으로 풀어내는 신비함을 지닌다.
『걸립패나 매구패하면 옛날에도 큰 대접받는 계급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농민이나 서민의 유일한 강단이며 놀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사랑 받고 애호 받아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면서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고 말았지요.』
사물놀이 패의 한사람인 이광수씨(31·서울 마포구 아현3동 614)는 세찬 서구의 물결 때문에 맥이 끊어질 위기를 맞은 우리농악을 어려서부터 현장에서 익혀온 드문 젊은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농악을 하는 20, 30대의 젊은 사람은 15명 정도. 이 가운데 뜬쇠(프로급의 학습꾼)는 손으로 꼽을 정도여서 그 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씨의 부인 정미숙씨(31) 역시 여성 농악단의 실장고(리더격)를 맡았던 프로급 농악꾼.
충남 예산이 고향이었던 이씨는 6세 때 마을에 온 걸립패의 농악에 신명이 나서 상모돌리기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7살 때부터 사찰걸립패(사찰을 짓기 위한 모금걸립)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기 시작한 이씨는 68년 대구서 호남여성 농악단과 마주치게 된다. 정씨는 이때 끝장고를 맡은 쪼작쇠 (농악기술이 미숙한 사람)에 불과했다. 대구에서 사찰건립패가 해산되자 이씨는 여성 농악단 단장을 양아버지로 삼고 여성 농악단에서 일한다. 군 입대 후 제대-고등학교 농악 강사를 거쳐 다시 여성농악단과 합치게 된다.

<20∼30대는 15명 정도>
『몇 년 전 끝장고 꾼이었던 사람이 제대해 보니 실장고를 치고 있었어요. 그 재주도 재주였지만 나를 하도 끔찍이 돌보아 주어 그 때부터 은근히 마음이 끌렸고 결국 경북 왜관에서 결합이 된 셈입니다.』
전국을 함께 떠돌면서 결합된 이씨와 정씨는 서로 신명이 통해 결혼생활에 들어갔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전국을 떠돌아다닌 두 사람이었지만 막상 78년 겨울, 서울에 와 신혼생활을 시작 할 때는 전세방 하나 얻을 돈이 없었다.
70년부터 이씨는 농악경연대회 때마다 최고상을 탔다. 그러나 농악자체로는 생계 수단이 막연했던 시절이었다.
『15년 전부터 걸립패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며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우리농악은 암흑기를 맞은 거나 같았습니다.』
한푼 없이 상경한 이씨 부부에게 전세방 한 칸을 얻고 살림을 차려준 것은 이씨의 누나.『열심히 살면 길이 생길 거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그이를 돌보아 준 다는 것 자체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었어요.』
정씨는 암담했던 시절에 유일한 힘이 된 것 역시 농악의 장단이었다고 말한다.
79년 이씨는 이미 78년에 조직되어 있던 사물(꽹과리·장자북·징) 놀이패를 만나 함께 연습장 겸 학원경영을 시작했다. 김덕수(31) 최종보(31)씨 등 국악예술학교에서 농악의 이론과실기롤 함께 공부한 두 사람, 그리고 이씨처럼 걸립패를 따라다니며 기술을 전수한 김용배씨(32)를 합해 4명이 사물놀이의 한패가 되었다. 농악의 가장 중심 되는 사물의 현대 속에서 살려보자는 의도였다.
사물놀이 패 4명은 모두 전국농악경연대회 최고상을 수상한 경력의 소유자들. 이들의 합숙훈련에 여러 가지 뒷바라지를 해준 사람이 정씨여서 모두 한 식구나 마찬가지다. 이씨 부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사물놀이 패의 나머지 3명도 모두 농악 하는 아내를 맞아 8인 구성의 걸립패를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딸에게 이어주고 싶다>
『요즘은 지신밟기나 두레굿·걸궁굿 등 현장에서의 농악이 없는 대신 무대에서 농악이 인정받기 시작했지요.』
이씨는 농악이 다시 일반의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이 난다고 했다. 신명이란 상대적인 것이어서 관중의 박수가 많을수록 더해진다는 이씨의 설명.
3살 난 딸 현정이도 아버지의 꽹과리, 어머니의 장고 장단에 익숙해져 순박한 농악의 춤을 벌써부터 하나 씩 익혀나가고 있다. 이씨는 바로 우리민중의 숨결인 농악을 자녀 대에도 이어주었으면 바라고 있다.
아직 전세방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부부다. 그러나 머지않아 걸립패를 조직, 세계 각처의 지신밟기를 해 우리의 신명을 세계에 전하겠다는 것이 부부의 희망.
결혼식은 그 이후 적당한 시기에 농악대의 굿장단 속에서 올리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김징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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