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려자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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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세계승가대회에 1백여명의 한국승려가 참석했지만 한사람도 영어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벙어리 노릇」을 면치 못했다. 국제적인 공식회합에 나가면서 언어소통의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통역이라도 데리고 갈 것이지…. 세계수준의 승려자질 향상과 이를 뒷받침할 현대적 승가교육이 시급하고 절실하다.』
이는 지난 1월 불교 조계종 중앙총회에서 종회의원인 황진경 스님(현 총무원장)이 바로 한달 전에 열렸던 대만 세계승가대회의 참석소감을 피력한 내용이다.
한국불교 승려자질의 한 단면을 숨김없이 노출시킨 채 승단의 각성을 채찍질한 이같은 발언은 오늘의 불교승단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질 것 같다.
물론 불교가 국교이긴 하지만 스리랑카의 경우 영국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세계적인 명문대학의 박사학위를 소지한 승려만도 1백명을 넘는다고 한다. 따라서 스리랑카 불교승단은 곧 스리랑카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회지도층이며 지식층이라는 것이다.
태국·버마·대만·일본 등의 승려들을 교학적인 지식 면에서는 영·독·불어 등의 세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승려정도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승단은 부처님(불)·경전(법) 등과 함께 불가의 삼보라고 한다. 그래서 승려는 불교에서 중요한 존경의 대상이며 보배로운 존재다. 원래 승가라는 말은 범어의「sa igha」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중·집단·회의를 뜻하며 수행공동체 또는 화합중의 의미를 갖는다. 최초의 승가는 부처님과 함께 수행한 적이 있고 후일 부처님의 초전법륜으로 불교도가 된 5명의 비구가 그 효시-.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불가신도까지를 포함하여 대승불교의 경우는 더욱 포괄적이다. 흔히들 스님을「중」이라고 부르는 것을 불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원래의 승단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전혀 그 반대인 것이다.
오늘의 한국불교 승단(승려 총수=2만7백명·여승 6천5백명)이 안고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절실한 문제는 승려자질 향상-.
승단은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불교의 핵심요소이며 불교발전을 좌우하는 실제적인 동인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겠다.
금·금동·철·목불, 탱화 등의 불보나『8만 대장경』을 비롯한 부처님 및 숱한 조사들의 훌륭한 경·륜·윤·법문 등의 법보는 세계에 손색이 없는 한국불교다.
그러나 현재의 승단자질은 궁중·어용불교라는 비판의 고려불교나 산간·부녀불교라는 조선조불교 때보다도 뒤져있고 자칫하면『불교가 국민생활에서 영원히 소외될 위기에까지 이르렀음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황성기 씨(전 동국대 교수)의『한국불교 재건론』>
승려자질 문제는 승려교육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따라서 거듭 용두사미가 되고있는 조계종단의 승가대학을 비롯한 불교 종단들의 과감한 승려교육기관 확충과 강원·예방 교육체계가 종교사회학·윤리학·어학 등의 폭넓은 관계학문을 수용하도록 시급히 근대화돼야 할 것 같다.
다음은 승단의 단합문제다. 불교승단은 1920년대부터 한용운의『조선불교유신론』, 박한영의『조선불교 현대화론』을 통해『때와 곳에 따라 상산사처럼 변절에 더없이 능란하다』는 호된 비판을 받아왔다.
오늘의 불교승단에는『저녁에 인감증명서를 붙여 무인까지 찍고도 아침이면 그런 일없다』고 한다는 말이 유행한다. 이같은 승단풍토는 자주 사회로부터 「제행무상」의 여법을 실천(?)하는 것이냐는 빈정거림과 준열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한용운 선사는『일이 동쪽에서 생기면 비방이 서쪽에서 일고, 의견이 아침에 합해지면 취지를 저녁에 달리하여 하나도 이루는 것이 없는 실정』이라고 승단의 분열상을 비판하면서 승려들을 혼돈파, 위아파(몸조심파), 오호파(탄식파), 소매파(냉소파), 포기파, 대시파(방관파) 등 6개 파로 분류했다.
이제 불교는 78년 개운사파, 조계사파로 갈린 조계종 승단의 내분이 한창일 때 동국대 승가학과 학생들이 서울 조계사 주위를 돌며 『승가 불이불』(승가는 하나로 뭉치라)이라고 외치던 절규를 거듭 명심해야 할 것 같다.
끝으로 승려들의 자세문제다. 박한영 스님(1870∼1948년)은『뜻 좋고 멋진 호 안 가진 사람 없고 덕과 지혜를 갖춘 듯 하지만 모두가 사뭇 겉치레일 뿐』이라고 당시의 승려들을 힐책하면서『경전에서 얻은 알량한 지식에 자족한 채 여래께서 물려준 복으로 그럴듯한 거처에 살며 배움을 갈구하는 사람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승단을 비판했다.
한심한 것은 머리 깎고 먹물 옷 입고 절에만 있으면 그날로 큰스님을 자처, 도승으로 떠받치는 기막힌 현실이라는 호된 비판도 있다(황성기 씨).
물론 이같은 승단에 대한 갖가지 비판과는 달리 심오한 자기수행과 중생교화라는 대승불도의 대해에서 본연의 사명을 다하고있는 승려도 적지 않다.
어쨌든 한국불교 승단은 불교중흥의 조타수임을 깊이 명심, 진리의 자리에서 다시 자재롭게 생활현상으로 되돌아오는 출공입유의 자세를 가다듬고, 앞으로 깨닫고 체득하는 구두단이 아니라 수법의「실행함」을 보이는 자세를 모두가 정립해야 할 것 같다. <이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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