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8)제77화 사가의 혈투 60년(16)|아들 택구와 홍수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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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동생에 뒤따라 아들도 복싱계에 뛰어들었다. 우리나라 복싱사상 나는 「형제복서」에 「부자복서」의 리스트에 동시에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3남2녀중 장남인 택구(현재 33살)가 고교입학을 전후한 16살 때부터 복싱을 시작, 고3인 18살에 프로로 전향했고 72년 국내 페더급 1위까지 올랐다가 은퇴했다.
지금은 나와 함께 선수육성에 힘쓰고 있다.
택구는 데뷔초기에 상당한 기대를 모았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페더급인데다 스타일이 영락없이 「50년대의 김준호」를 빼어 닮았던 것이다. 전형적인 부전자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부자전이 아니었다.
체질이 달랐다. 나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 복싱 입신의 뜻을 세워 온갖 역경을 맨주먹으로 헤쳐나갔으며 해방이후와 6·25전란의 어려운 시기에도 오로지 육신 하나를 밑천으로 땀을 쏟고 피를 흘리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주렁주렁 매달린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그러나 택구는 -스스로 말하듯-『어려움을 모르고 곱게 자랐으니 끈기와 집념이 부족하고 도대체 얻어맞는다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생리는 꼭 그의 삼촌 경호를 닮았다. 경호는 56년 공상렬과의 대전 때 5라운드까지 자신의 KO펀치가 터지지 않자 또 링을 기어내려올 태세였다. 세컨드를 보던 내가 엉덩이를 걷어차며 되밀어 넣었다. 이런 식으로 10라운드를 간신히 끝냈다. 경호의 판정패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택구도 복싱경기를 하는 정신적인 자세가 이와 비슷했다. 강단이 없었던 것이다.
택구는 그 성장과정이 홍수환과 똑같다. 같은 나이에 어릴 때부터 동네친구였다.
그러나 이질의 콤비였다. 그 성격상의 차이점이 「세계왕자」와 「국내랭킹 1위 정도」로 둘을 갈라놓았다.
서울 종로구 내수동의 아래·웃집에 살았다. 수송국민교를 6년간 홍수환과 택구는 어깨동무하며 다녔다.
홍수환의 아버지 홍경섭씨(67년에 별세)는 당시 사업을 해 부유하게 살았다. 그는 이웃사촌으로 친한데다 복싱을 무척 좋아해서 경기가 있을 때마다 구경왔다.
그는 권투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열성 팬이었고 언제나 아들 수환이를 데리고 다녔다.
평소 홍경섭씨는 『김 선생, 내 아들을 세계챔피언으로 만들어 주시오』하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홍수환은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꼬마세계에서 싸움대장이었다. 겁이 없이 소위 깡다귀가 대단했다.
택구는 일종의 타고난 체질 덕으로 주먹이 셌고 싸움엔 고수였다.
둘은 죽이 잘 맞아 어울려 다녔다.
중학을 택구는 대신중, 수환이는 중앙중으로 진학하고 이사까지 하게 되어 3년간을 헤어져 있었다.
고교진학 직후(각각 대신고와 중앙고) 둘은 우연히 재회, 인생을 논하케 되고 마침내 나란히 복싱에의 길을 걷기로 뜻을 모았다.
삼각지에 있던 동양권투구락부(관장 김원익)에 나갔다.
그곳은 내가 서강일을 훈련시키고 있던 곳이다.
택구와 홍수환의 수련태도는 성격 그대로 퍽 대조적이었다.
택구는 적당 적당히 넘어갔다. 그런데도 복싱의 틀이 일찍 잡혔다. 「내림」이란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다.
홍수환은 악착같았다. 그리고 영리했다. 나름대로 연구하여 독특한 스타일을 창안하기도 했다. 눈이 빠른 것이 큰 무기였다.
고교 2학년 때 둘은 건국학생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했다.
택구는 플라이급, 홍수환은 주니어플라이급이었다.
택구는 의외로 승승장구, 결승전까지 치다랐다.
그러나 준우승에 그쳤다.
반면에 홍수환은 일찍 탈락하고 말았다.
1년 후 고교 3학년 때 18살 나이로 이번에도 둘은 똑같이 프로로 뛰어들었다.
70년2월 장충체육관에서 4라운드의 데뷔전을 가졌다.
페더급의 택구는 승리, 홍수환은 무승부였다.
이토록 처음엔 택구가 성공적이었고 홍수환은 한수 뒤졌다. 그러나 최후의 영화는 집념의 홍수환이 누렸음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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