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밖에 없는 로맨틱한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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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배우 콜린 퍼스(54)가 이번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스릴러 ‘내가 잠들기 전에’(원제 Before I Go to Sleep, 10월 30일 개봉, 로완 조페 감독)로 찾아온다. 영국 소설가 S J 왓슨의 베스트셀러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콜린 퍼스를 다시금 눈여겨보게 한다.

이 영화의 콜린 퍼스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지난 여름의 ‘매직 인 더 문라이트’(8월 20일 개봉, 우디 앨런 감독)를 말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그는 우디 앨런 감독과 왜 이제야 만났을까 싶을 정도로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줬다. 과학과 이성만을 신봉하는 마술사 스탠리(콜린 퍼스)가 미국인 심령술사 소피(엠마 스톤)의 속임수를 밝혀내려고 애쓰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스탠리는 그의 과거사를 모두 밝혀내는 소피에게 되려 반하고 만다. 매사 까칠하고 제 잘난 맛에 살지만 은근히 귀여운 이 남자가 이 영화의 최대 매력인데, 사실 이는 콜린 퍼스의 공인된 맞춤옷이라 해도 좋은 모습이다.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혹은 ‘마음을 잘 열진 않지만 한 번 열면 무지 로맨틱한’ 남자.

50대 중반에 이토록 귀엽고 매력적인 멜로를 소화해 낼 배우가 몇이나 있을까. 그렇게 콜린 퍼스는 올해 스물여섯인 엠마 스톤과도 근사하게 어울리는 모습으로 아직 죽지 않은 ‘미스터 다시’의 면모를 과시했다.

미스터 다시, 콜린 퍼스를 세계적인 로맨틱 가이로 만들어 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샤론 맥과이어 감독)의 캐릭터 마크 다시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를 영국의 국민 배우로 만들어 준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1995)의 캐릭터 역시 미스터 다시, 즉 피츠윌리엄 다시였다. 마크 다시가 피츠윌리엄 다시에서 따온 인물이란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미스터 다시는 콜린 퍼스의 지적인 분위기와 부드러운 매력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이제 ‘내가 잠들기 전에’로 돌아오자. 이 영화의 벤(콜린 퍼스)도 언뜻 보면 미스터 다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인물 같다. 나이 마흔인 아내 크리스틴(니콜 키드먼)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기억이 20대 시절로 돌아가 있다. 그래서 혼란스러워하는 크리스틴에게 벤은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당신은 아주 큰 사고를 당했어. 그리고 기억을 잃었지.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살고 있어.”

벤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라. 자신과 결혼한 사실조차 잊은 여자에게 매일 아침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 얼마나 피곤할지, 매일 아침 큰 충격을 받는 여자를 달래는 일이 얼마나 지루할지. 그럼에도 벤은 부드러운 목소리, 따뜻한 포옹으로 이 모든 아픔을 감싼다.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콜린 퍼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누구라도 이 로맨틱한 남자를 믿고 의지하고 싶어진다. 로완 조페 감독이 콜린 퍼스를 벤으로 낙점한 것도 그래서다. “벤은 매일 아침 아내의 모습을 견뎌주는 아주 따뜻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다. 평생 아내에게 설명해줘야 하고그걸 기꺼이 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남자의 타입이 있다. 바로 콜린 퍼스와 같은 남자다.”

이 영화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크리스틴은 매일 아침 남편이 출근한 뒤 의문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녀가 기억을 찾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내쉬 박사(마크 스트롱)의 전화다. 내쉬 박사는 크리스틴을 더 큰 혼란에 빠뜨린다. 과연 기억 상실 뒤의 진실은 뭘까. 남편 벤은 진짜 어떤 사람일까. 이야기는 관객의 호흡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건 크리스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시선이 벤에게로 향하고, 그를 의심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된다는 점이다. 콜린 퍼스가 풍기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그가 공고히 쌓아온 미스터 다시의 이미지 때문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가 배우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가장 잘 활용하는 동시에 이를 통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영리한 무대가 된다.

맞춤한 연기와 색다른 도전 사이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오가는 이유로는 그가 영국에서 제일 바쁜 배우 중 하나라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1984년 ‘어나더 컨트리’(마렉 카니브스카 감독)로 데뷔한 이래로 그는 해마다 두 편 이상의 작품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비치는 부지런한 배우다. 그렇게 쌓아온 이력 중에 ‘브리짓 존스의 일기’가 그를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려 놓았다면 ‘킹스 스피치’(2010, 톰 후퍼 감독)는 그의 연기력을 다시 보게 했다. 평소 외국인의 귀에도 또박또박 들려오는 발음과 명징한 말투의 소유자인 그가 실존 인물이자 말더듬이인 영국 왕 조지 6세를 연기하는 건 만만찮은 도전이었다. 스스로 “연습을 너무 많이 해서 촬영을 하지 않을 때도 말을 더듬을 지경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 노력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줬다. 전년도에도 ‘싱글맨’(2009, 톰 포드 감독)에서 연인을 잃은 동성애자 교수를 연기해 후보에 올랐던 그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의 모습은 흥미롭다. 단편 소설 ‘더 디파트먼트 오브 낫씽’(The Department of Nothing)을 쓴 작가이자 국제 구호 단체 옥스팜과 함께 하는 활동가다. 그와 함께한 동료 배우의 말도 들어보자.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배우임에도 정말 편하고 섬세한 사람이다. 이야기를 무척 잘 들어준다는 점은 배우로서도 큰 강점이다. 무뚝뚝할 것 같지만 그는 영국식 농담도 즐겨하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레일웨이 맨’(10월 16일 IPTV 개봉, 조나단 텝리츠키 감독)에 이어 ‘내가 잠들기 전에’로 그와 두 번째 호흡을 맞춘 니콜 키드먼의 말이다. 쉴 틈 없이 달리는 그의 차기작은 내년 2월 국내 극장가에 찾아 올 매튜 본 감독의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 스파이 훈련을 맡은 베테랑 비밀 요원이 된 콜린 퍼스라니. ‘내가 잠들기 전에’의 놀라움은 곧 뒤로 밀려날지 모르겠다.

임주리 매거진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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