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초대 내각(8)|국정의 본산 「세종로 1번지」34년… 명멸했던 주역들은 증언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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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국회는 정부 전복 논의로 결속되어 대통령에게 내각개편을 건의하기에 이른 모양이다. 이 분들의 계획은 대통령이 국회 뜻을 안 받아들이면 장차 불신임안도 제출하고 그 다음 또 무슨 조건이든지 만들어서 정부를 맘대로 해 나가자는 계획이라는데 이런 문제를 알고 내각 개조에 찬성 투표를 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국회에서 정한 헌법에 입법부가 행정부를 개조할 권리도 없고 이유도 없는 터이니 입법무가 먼저 헌법을 위반하고 행정부를 우롱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또 정부를 타도하려는 공산 분자의 반란죄를 정부에 씌운다면 이것이 정부를 돕는 것인가, 공산당을 돕는 것인가. 우리 정부를 밖에서 공산당이 치고 안에서 국회가 쳐서 국가 운명만 위태롭게 한다면 이 국회가 민의에 따르는 국회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정부가 선지 3개월도 되지 않았다.

<방송 통해 반박>
지금은 국민들이 합심해 독립의 기초를 다져야지 사감이나 허영심으로 정권을 타도하려는 언동은 버리기를 당부한다.』 48년11월7일의 대통령 특별 방송요지다.
대통령은 여순 반란사건 등 일련의 반란 사태에 대한 문책으로 국회가 내각개편을 요구한데 대해 방송을 통해 이같이 회답한 것이다.
그해 10월부터 11월 사이 여수·순천을 비롯한 전국곳곳에서 공산반란이 일어나 경찰서 등이 습격 받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국회가 그 책임을 추궁했을 때 이 대통령은 <유엔 총회의 한국문제 상정을 앞둔 공산당의 만행>이라고 사건을 설명하고 개각공세의 시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국회는 현 내각은 약체 내각이므로 거국적인 강력 내각을 구성해야만 난국을 수습할 수 있다고 결의했었고 대통령은 이런 국회를 공개적으로 반박한 것이다.
이로부터 시작된 내각과 국회의 잦은 충돌은 불행한 정치의 서막이었다. 건국 초의 정치과제는 전통으로 굳혀질 좋은 관례를 만들어 가는 일이었지만 내각도 국회도 이 숙제를 풀어 가는데 미숙했다. 건국 초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된 대통령답게 국회를 존중했다.
국회에 자주 나오고 국회 결의를 받아들이려 애썼나. 그러나 기본적인 문제에서 대통령과 국회간엔 간격이 두드러졌다. 이윤영씨 총리 인준이 부결되었을 때 대통령은 국회 내 파당 때문이라고 했다가 국회의 반발을 샀다.
대통령은 국회 본회의에 나와 <어떤 정당이 대통령을 후원 해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까 그 정당으로 정부를 조직하고 다른 쪽은 물리쳐야 한다는 것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민당 중심의 조각을 거부했다. 그 이유로 대통령은 <민주주의는 정당 없이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정당이 2∼3개 있고 이들 정당의 정책 차이를 보고 국민이 선택을 했다면 중심의 내각이 되어야 하지만 국회 안에도 20여 개 정파가 있는 우리 현실>이라고 했다.
그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노일환 의원(한민)은 <총리인준 부결이 민의가 아닌 듯이 말한 것은 대통령의 독선으로 마치 천성 제와 비슷한 말>이라고 공격했고 윤치영 의원이 나와<대통령을 일본의 천황에 비유한 노 의원을 반역자로 규정, 국회에서 축출해야 한다>고 맞서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역시 국회의 분위기는 국회 내 정파를 중요시한 내각의 요구였다. 국회는 총리 인회에 이어 곧바로 조각에 관한 건의를 통해 이런 의사를 밝혔다.
조각건의 때의 논란을 옮겨 보자.
△조헌영(한민)-대통령이 총리는 정파에서 요망하는 사람은 안 된다고 했는데 장관임명 마저 그래서는 안 된다 △신생균(무)-이 총리는 군인출신이니 내각이 군국구의나 경찰 국가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염려를 알려야 한다. △박순석 조각건의 가결(무)-조각에 대한 건의는 위헌이다. △최태규(무)-항간에는 박흥식 상공(박씨는 친일파로 지목 돼 있었음) 장택상 내무 설까지 나오는데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김효석(독촉)-군정청 부처장의 국무위원 기용은 안 된다는 뜻을 전달하자.
결국 30여명의 의원이 토론에 나섰고 표결결과는 재석 1백66중 가1백21, 부16으로 조각건의가 가결되었다.
다음날 김동원 부의장과 신성균 의원이 대통령을 찾아가 국회결의를 전달했다. 대통령은 처음엔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김 부의장이 <국회에선 이런 건의가 대통령의 권한 침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부에 협조할 뜻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자<충분히 참고하겠다>고 했다.
최초의 헌법에선 국회의 국무위원 불신 임권이 없었다. 그럼에도 국회는 빈번하게 국무위원 불신임 결의를 채택했고 이 때마다 대통령은 법에 없는 결의는 정치제도를 문란케 한다고 경고했다. 대통령은 윤치영 내무와 전진한 사회부장관의 충돌 사건 후 윤 내무를 해임하면서 국회에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에서 대통령은 <국회의 각료변동 요청은 대통령이 내정했던 각료 이동 공포에 장애가 되었다. 이런 사실을 밝힘이 없이 변동을 발표하게 되면 입법부의 요청을 행정부에서 실시하였다는 오해가 생겨 금후에라도 입법과 행정이 혼돈 될 폐단이 없지 않을까 우려돼 진술한다.
이번 대통령의 내정이 국회의 뜻과 합치하였다는 것은 다행으로 여기나 국회 결의와는 상관이 없음을 공포하여 다음에라도 헌법상위반의 전례를 삼지 않기 바란다>라는 내용. 이런 대통령 서한에 대해 국회는 역시 납득하지 않았다. 한민당 소속의 서우석 의원은 우리 헌법은 엄격한 권력 분립주의는 아니라고 주장, 총리를 출석 시켜 국회가 국무위원의 파면 결의나 불신임을 할 수 있다는 다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 얼마 뒤인 49년6월 기부금 문제가 시끄러운 정치문제가 되었다. 지방 행정기관이 각종 명목의 기부라는 이름으로 돈을 강제로 거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문제가 커진 것은 전북도가 대한 청년단비·경찰후원비 등 명목으로 2억 원의 고지서를 발부한 것이었다. 국회내무치안위원장 나용균 의원은 이 문제에 대해 내무부는 긴급 예산을 영달해 주면 기부금 폐단을 없애겠다고 했음에도 여전히 기부금을 거두고 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불법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그가 전북에서 기부금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힌 얼마 뒤 전주에 온 신성모 내무장관은 도민의 발전을 위해 자발적 기부금은 필요하다고 했고 전북지사도 징수를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회에선 기부금이 전국적 폐단이라 해 문제를 확대했고 결국 △전북지사의 파면, 신 내무장관 불신임결의 △국무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의 사퇴결의안 채택의 두 가지 처리방안을 놓고 표결을 했다.

<국회설득 연설>
표결 결과는 내각 총 사퇴 건의안이 재적 1백44중 가82, 부61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 요구를 이 대통령이 받아들일 리도 없었고 또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국회에서도 구속력도 없는 결의니 차제에 내각 책임제 개헌을 추진하자는 주장이 나오던 때였다. 대통령은 6월13일 국회에 나와 시국에 관한 긴 연설을 통해 국회를 설득했다.
이 연설에서 대통령은 △전북지사는 조사해 조처하겠다 △그러나 현행 헌법 하에서 국회가 내각의 개조를 요구하는 것은 부가하다 △최근 개헌논의가 신문에 보도되고 있는데 사실이라면 유감이다 △정부와 국회는 합심해 나갈 때다 라는 간곡한 당부였다. 이 무렵까지도 대통령은 국회의 요구를 존중했다. 그는 국무위원 불신임이 위법이라면 서도 국회에서 문제가 된 장관이나 처장은 교체해 왔다. 적어도 그 무렵 의원들은 대통령이 극회를 존중했다고 말한다.
제헌의원이던 김인식씨의 회고.『제헌국회 때 이 대통령은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려 애썼고 국회의 말도 잘 들었다. 국회에서 출석요구를 할 때면 거절하는 법이 없이 꼬박꼬박 국회에 나왔으며 국회가 장관 불신임안을 결의하면 기간이 다소 지난 뒤라도 반드시 장관을 바꾸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한민당만이 당책이나 당략을 내세워 한 가지씩 조직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갔을 뿐이다.
다수의 무소속들은 <독립이 되었으니 나라의 터전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때그때 욕심 없이 대처했으나 일관된 방향이 없었다. 당시 우리들 소장파의원들은 대동청년단 출신과 무소속 등으로 50명을 규합해 있었으나 불행히도 리더가 없이 단지 보수적이고 지나치게 당략만을 앞세운 한민당에 반대했을 뿐이다. 이 대통령은 한민 당의 독주를 잘 견제했다.
확실히 초기의 장관이나 의원들 모두가 의회정치에 미숙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48년11월 대통령은 특별 방송을 통해 정부시책들에 대한 국회의 까닭 없는 공격을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비난한 일이었다. 이 때도 국회에선 문제가 됐다.
그런데 김동명(공주)의원은 <국무회의도 다수결로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국무위원이 13명인데 국회의원으로서 나간 분이 7명이다. 13명 중 7명이 손들면 언제든지 국회 의사를 대변할 수 있을 텐데 이 분들이 가서는 기권을 하는지 반동을 알 없다. 국회의원인 국무위원을 불러 국회결의를 준수하도록 하고 만일 듣지 않으면 징계에 회부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엉뚱한 발언인데도 사회를 보던 김야수 부의장은 <그렇게 교섭하고 단판 해 보겠다>고 했다.
또 감찰위원회의 고발을 당해 문제가 된 조봉암·임영신 두 장관 사건 때 50명 선에 이르는 의원들이 장관의 유임을 건의하는 연관장을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런 사례는 의회와 내각의 기능을 모르던 정치 미숙의 「걸음마 국회」를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장관에 대한 공개적인 불신임은 반드시 문제 거리는 아니었다 그 보다도 심각한 폐단은 이면의 모략과 공작들이었다. 대통령의 장관이나 의원에 대한 불신과 독선, 그래서 인물 빈곤으로 단정하게 만든 데는 이런 정치 미숙에 책임은 없었을까. 이런 것을 말해주는 건 농림장관 신중목씨의 회고.
『초기 장관들이 단명한데 대해 이 박사는 어느 날 이같이 말했어요 <내가 국내 사람을 아는가. 남들이 좋은 사람이라 해서 써 보면 사흘도 못 가서 사방에서 그 사람 나쁘다는 소리가 들려. 그래 헐뜯는 사람들에게 증거를 대라면 이러저러한 대거든. 시켜서 조사해 또 과연 나빠.
세상에서는 나더러 무리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나쁜 사람인줄 알면서 장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잖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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