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 읽기] 뭔가 다른, 러시아인의 '문화 유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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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엔 유럽식 교육을 받고 자란 러시아 귀족 처녀 나타샤가 처음 듣는 러시아 민속음악에 맞춰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주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리듬을 타는 나타샤를 보곤 놀라워 하면서도 흐뭇해 한다.

러시아인들의 문화적 동질성을 잘 묘사해주는 대목이다. 계급과 신분이 달라도, 서로 다른 교육을 받아도, 삶의 바탕이 이질적이라도, 러시아인은 역시 러시아인이라는 것이다. 러시아인이 지니는 공통의 문화 유전자라고나 할까. 책의 제목은 바로 이를 상징한다.

저자는 러시아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본질을 찾아 독자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난다. 기간은 근대화를 시작한 표토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18세기 초부터 소련의 브레즈네프 집권기인 1970년대까지. 저자는 약 300년 간 러시아 문화의 영고성쇠를 다룬다.

러시아의 근현대 문화사이지만 문학.미술 등 개별 장르의 역사를 모아놓은 데 그치지 않는다. 문화인들의 일대기나 연대기적 사상사에 머물지도 않는다. 대신 저자는 러시아 문화의 큰 흐름을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이를 위해 러시아인들의 실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예컨대 귀족과 농노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생활을 짚어보거나, 1812년 러시아로 침공해온 나폴레옹의 눈으로 본 러시아 사회상도 다룬다.

이와 함께 방대한 일차자료를 바탕으로 러시아 문화에 얽힌 일화들을 풍부하게 소개한다. 평소 프랑스어를 쓰다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서야 러시아어를 다시 배우는 러시아 귀족, 19세기 초 프랑스인도 혀를 내두를만큼 발달한 모스크바의 미식(美食)문화, 에이젠쉬타인의 영화 '10월'에 실탄이 장전된 소총을 들고 출연한 퇴역군인들, 공상과학(SF)소설을 통해 우주여행을 꿈꿨다는 레닌…. 역사이면서 동시에 이야기로서의 재미가 쏠쏠하다.

이런 얘깃거리가 시대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는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 관심이 가는 부분만 골라 읽어도 충분하다.

저자는 1959년 런던 출신으로 캠브리지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런던대학 버베크 컬리지의 역사학 교수다. 러시아 문화사를 쓰겠다는 분명한 계획 없이 3년간 무수한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산더미처럼 모아뒀다고 한다. 이게 쌓이고 쌓여 한 순간에 둑 터지듯 쓸려내려와 모인 게 이 책이다.

영국과 미국에선 개인들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함으로써 러시아 문화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주.용어해설.참고문헌.찾아보기가 200쪽에 달해 자료적인 가치도 있다. 뉴욕 타임스는 2002년 '기억할 만한 책 25권'의 하나로 꼽았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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