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식 신부 연행에서 구속까지-취재기자 방담|전 수사기관 분망…숨가빴던 사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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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사건의 주범과 배후조종자 등이 성당이라는 종교영역을 은신처로 했고 최기식 신부 등 성직자가 적극 가담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사건의 성격이 급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 신부의 연맹에서 구속까지 3일간은 숨가빴던 순간 순간이었습니다.
지난5일 최기식 신부가 원주에서 연행될 때만해도 『신부인데 구속까지야 하겠느냐』던 추측이 하룻밤을 새우고 난 6일 아침 『구속할지도 모른다』에서 이날하오 『구속할 것 같다』로 급회전했고 7일에는 상오의 『8일 구속』에서 하오엔 『7일 부산구속』의 경찰발표로 이어졌어요.
-최 신부 신병처리 문제를 놓고 정부차원의 각료회의가 열렸는가 하면 수사기관·검찰·경찰·문공부의 실무자로 임시 대책기구가 긴급구성 돼 매일 회의가 열렸으며 이들 기관을 잇는 전화벨이 끊이지 않았어요.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어떤 종교단체도 국법을 초월할 수 없다는 정부의 기본방침을 재확인함으로써 최 신부에 대한 구속결정은 사실상 이때 내려진 셈이지요.
이 대책회의에 이어 관계 비서관들의 대책회의가 늦게까지 계속됐습니다.
치안본부 간부들은 7일 아침까지도 기자들에게 『오늘은 구속하지 않는다』고 장담을 했어요.
이 같은 분위기가 급전진하로 바뀐 것은 이날 하오2시부터 열린 실무자 대책회의 직후부터였어요.
하오4시30분쯤 대책회의에 다녀온 박배근 4부장이 황급히 본부장실로 들어가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 안 본부장과 함께 장관실로 들어갔고 곧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전갈이 나왔어요. 이날 대책회의에서는 범법자를 고의로 은닉한 사실이 드러난 이상 빨리 구속하는게 좋다는 결론이 난 것으로 알려졌어요.
곧이어 사건발생지인 부산시경 실무자들에게 비상 대기령이 내려졌고 영장신청을 위해 하오7시 비행기편으로 수사기록이 부산으로 공수됐어요. 또 충북도경에 오상근씨의 신병을 부산에 압송할 수 있도록 서울로 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이번 사건은 수사관계 취재가 종교관계 못지 않게 어려웠습니다. 전 수사기관이 동원되었던 만큼 경찰단독 결정이 어려웠고 자신 있게 과정 하나하나를 흘릴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수사도 보도진의 접근이 어려운 모처에서 했고 수사결과 보고서는 모두 8부만 복사를 해 내무부에서는 장·차관. 치안본부장, 치안본부 3·4부장이외는 내용을 일체 알지 못했답니다.
-문부식까지는 치안본부3부(수사담당)에서 했지만 김현장부터는 4부(정보담당)에서 전담, 취재의 어려움을 겪었지요.
-검찰의 대의접촉 창구는 이창우 대검공안부장 검사가 맡았어요. 그러나 이 부장은 시종 일관 『수사주체가 아니라서 전혀 모른다』 『나보다 더 많이 아는데 뭘 자꾸 묻느냐』고 시치미를 떼더군요.
-최 신부 연행하루만인 6일 낮부터 검찰의 분위기는 『구속이 필연적』이라고 바뀌었어요. 서울지검 공안부도 관계법조문 등을 검토하는 등 바쁜 움직임이었고….
6일하오 열린 관계관회의에서는 검찰이 『이왕 구속할 바에야 지체하지 말고 오늘 중으로 처리하자』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요.
-하기야 최 신부가 영장 없는 임의동행 형식이었으니 하루빨리 합법적 절차를 밟으려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피의자가 신부라는 성직자의 신분이었으니 수사기관이 뒷말이 없도록 신경을 썼다고 봅니다.
-어떤 검사는 최 신부에 대한 조사가 늦어진 이유를 「교과서적인 수사」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하더군요. 신분이 신부인 만큼 강제수사를 피하고 김현장 등 다른 피의자들로부터 받은 진술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란 얘기지요.
-최 신부 구속방침이 알려진 후 서울지검은 과연 구속영장을 서울·부산·원주 중 어느 곳에서 청구할 것인지 사건관할을 놓고 「연구검토」가 많았지요. 서울에서 청구할 경우에는 서울지검 공안부가 영장서명을 해야하기 때문에 무척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어요.
-막상 7일하오 관계관회의에서 부산으로 결정되자 서울지검 공안부는 허탈한 속에서도 다행이라는 안도의 표정들이었습니다.
-부산으로 이송되던 7일 서울 용산경찰서에는 하오7시부터 1백여명의 보도진들이 몰려 때아닌 북새통을 이뤘지요. 김상명 용산서 수사과장은 기자들이 닥치자 『웬일이냐. 우리 서에는 아무 일도 없는데』라면서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더군요.
-사실 최 신부 등에 대한 수사는 다른 곳에서 했지만 부산이송에 앞서 사진촬영을 위해 용산서를 택했으니 용산서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겠죠.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하오7시쯤 상황실장인 엄규성 경비계장에게 치안본부로부터 『하오8시부터 8시30분 사이에 용산서에서 촬영한다』고 연락이 있었다더군요.
-경찰의 고위간부는 『최 신부의 행위는 실정법도 위반했지만 교회법의 한계도 벗어난 것』이라면서 『성직자로서의 최 신부를 구속한 것이 아니라 범법자 개체로서의 최 신부를 구속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더군요.
이는 『교계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기본입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그동안 당국이 최 신부사건을 놓고 고민을 거듭한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발언입니다.
-검찰의 한 관계자도 지난 79년8월 오원춘씨 사건 때 검찰이 관련 신부2명을 구속한 뒤 진퇴양난에 빠졌던 교훈이 있음에도 이번에 최 신부를 구속한 것은 그때처럼 천주교 전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최 신부 개인의 뚜렷한 범법사실」만을 상대로 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최 신부 개인의 범법사실은 공산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천주교에서 최 신부가 불순세력을 포용했다는 점에서 천주교 안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면서 정부가 ▲ 「북침 준비완료」「미군철수」등의 구호를 내건 부산방화 사건에 대한국민의 감정과 ▲원불교 관계자는 정정철을 숨겨줬다는 이유로 구속하면서 특정종교 관계자들은 더 적극적으로 범법자를 은닉했는데도 구속하지 앉느냐는 일부의 불만 등을 해소해줘야 하는 부담도 안고 있었다고 지적하더군요.
-치안본부가 서울로 연행한 최 신부를 부산에서 구속한 표면상의 이유는 주범이 있는 곳에서 종범을 수사한다는 수사원칙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이번 사건이 교구와 그 신부의 관련으로 「성당의 성역시비」와 「성직자의 범인은닉죄 성립여부」라는 방향으로 급전함으로써 공공질서파괴 사건인 미문화원 방화가 퇴색한 느낌이라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관할이 부산과 서울로 2원화 되어 소송이 진행될 경우 일반인들에겐 자칫 『부산은 방화사건』 『서울은 성역 논쟁지』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당국은 이번 사건이 어디까지나 일부 불순 학생과 그 비호세력의 폭력수단에 의한 질서파괴 사건이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사건발생지인 부산으로 모든 걸 귀결시키자는 전략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고 관계자들은 해석하고 있어요.
참석자-오홍근(사회부 차장) 고정웅(사회부 차장) 정일상(사회부 기자) 임수홍(사회부 기자) 권익(사회부 기자) 한간수(사회부 기자) 허남진(사회부 기자) 양형모(사진부 기자) 최재영(사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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