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3)제77화 사각의 혈투 60년(1)|서강일의 세계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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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65년 12월4일. 이날은 한국프로복싱에 새 시대를 여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세 가지의 뜻이 있다. 첫째는 복싱사 40년만에 최초로 세계타이틀에 도전, 마침내 탈 동남아의 발전적 변신을 이룩한 것이고, 둘째는 한국의 주먹도 세계정상을 쟁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실은 것이며, 세째는 세계프로복싱이 때로 실력제일주의를 외면하는 요지경일 수도 있다는 새 지식을 터득한 것이다.
한마디로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작은 둥우리를 벗어나 마침내 세계무대로의 둥지를 편 것이 이 날이다.
그리고 그 선구적 주역이 서강일이다. 이때까지 국내에선 프로복싱이 꽤 성행했으며 일본·필리핀 등과의 교류도 자주 있었으나 서강일의 세계 첫 도전만큼 프로복싱이 국민적 관심을 끈 적은 없었다. 더구나 당시 중앙라디오(동양라디오전신)가 한국방송사상 처음으로 해외에서의 프로복싱을 직접 중계함으로써(아나운서 전응덕, 해설 현영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밤10시 필리핀의 케손시 아라네타체육관. 3만8천명의 대관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역사적인 공이 울렸다.
챔피언은 섬광 같은 철권의 사나이라는 필리핀의 영웅 「플래시·엘로르데」.
나이 31살로 세계주니어 라이트급 타이틀을 이미 8번이나 방어, 5년 동안 세계왕자를 구가하고 있는 백전노장의 강펀치였다.
이에 비해 도전자 서강일은 21살에 불과한 「애송이」. 그러나 경력과 나이만으로 실력을 따질 일이 아니었다.
서강일은 61년 프로에 데뷔한 후 38전33승2무3패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사실상 극동에선 적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남은 상대가 「엘로르데」였다.
타이틀도전 한달 전 서강일은 세계 랭킹 2위에서 1위로 뛰어올랐다. 세계 랭킹 1위를 마크한 것도 한국복서로선 처음이었다.
대전에 앞서 국내의 기대는 물론이고 필리핀에서도 전문가들의 견해는 서강일의 우세로 기울었다.
경기장(링)의 경비를 맡은 경찰관들이 경기 후 승부가 결정되는 순간 재빨리「앨로르데」가 아닌 서강일을 호위하는 예행연습을 했을 정도였다. 「엘로르데」의 패배에 심술이 난 다혈질의 필리핀 관중들이 서강일에게 행패를 부릴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또 2주일전 현지에 도착한 서강일은 『「엘로르데」를 링 위에서 녹여 버리겠다』고 자신만만했으나 「엘로르데」는 『그는 말을 덜하고 더 잘 싸워야 할 것』이라는 정도의 기죽은 대꾸를 할뿐이었다.
실제로 두 선수는 1년 전인 64년11월 동양라이트급 타이틀을 놓고 마닐라에서 대전한 경험이 있었다. 이 동양타이틀에의 도전도 한국인으로선 역시 최초였다.
필리핀에 첫 모습을 보인 서강일은 맷집좋은「엘로르데」를 12라운드에서 다운직전까지 몰고 가는 등 일방적인 난타로 시종 했다. 「엘로르데」가 일발필도를 노려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왔으나 뛰어난 스피드의 서강일은 치고 빠지는 교묘한 전술로 포인트의 우세가 월등했다. 그러나 「엘로르데」의 판정승이었다. 필리핀 심판의 야료가 어처구니없었으나 첫 경험이라 어쩔 수 없었다.
따라서 「세계」를 건 1년만의 재도전은 절치부심의 설욕전이었다.
과연 공이 울리자마자 서강일의 보디웍은 신들린 듯, 춤추듯 정력이 넘쳐흘렀고 상대적으로 뚱뚱한「엘로르데」는 굼뜬 곰 같았다.
불꽃이 튀는 서강일의 피스톤 펀치는 1.2라운드가 거듭될수록「엘로르데」의 안면과 몸통 곳곳을 수없이 찌르고 할퀴어 나갔다.
「엘로르데」는 여전히 한방의 치명타만을 노렸다. 사우드포(왼손잡이)인 「엘로르데」의 레프트훅은 정평이 나있는 해머펀치였다. 바로 이것이 그의 승부수였다.
3라운드에서 한번 엉켜 붙었을 때 이 가공의 펀치가 서강일의 허벅지에 터졌다. 서강일은 흠칫했다.
턱이나 옆구리에 맞았더라면 큰일날 뻔한 순간이었다. 이것 외에 15라운드를 통해 서강일은 가벼운 유효타를 열번 정도 맞았을 뿐이었다.
3라운드에서 주심인 「빌라캄바」(필리핀)는 갑자기 경기를 중단, 서강일에게 감점을 주었다. 버팅을 했다는 것. 이상한 조짐이었다. 7라운드에서 주심은 또 감점을 선언했다.
사실 서강일은 탱크처럼 밀고 오는 「엘로르데」의 시한폭탄격인 펀치를 피하기 위해 홀딩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고개를 숙이기만 하면 주심은 버팅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서강일의 우세는 확연했다. 2점 정도의 감점은 문제가 아니었다. 종반에 주심의 편파성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8라운드 이후 4, 5차례나 「엘로르데」가 흠씬 얻어맞기만 하면 공연히 서강일에게 주의를 주는 체하며 그로기의 챔피언을 살려내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열전은 끝났다. 그래도 『설마』하며 판정을 기다렸다.
그러나 우려는 끝내 현실로 나타났다. 서강일의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였다. 주심과 2명의 부심이 모두 필리핀인이었다. <계속>

<서강일·박찬희·염동균·김철호 기른 외곬인생>
필자 김준호씨(59)는 한국프로복싱 계의 대표적 인물중 한사람이다. 50년대에 첫 페더급 챔피언을 지냈고 58년도에 은퇴 후 프러모터 및 트레이너로서 후배 양성에만 진력해온 외곬인생이다. 60년도에 국내에서 첫 트레이너가 된 김씨는 서강일을 시작으로 7O년대 이후에 홍수환 박찬희 염동균, 그리고 현재 김철호에 이르기까지 숱한 세계챔피언을 길러낸 명 조련사로서 프로복싱 발전에 기여해 왔다. 준호복싱관장.
(『사각의 혈투 60년』은 경기내용에 따라 필자가 달라짐)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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