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번역은 행간의 의미를 메우고, 영상 번역은 군더더기를 쳐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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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난주(56)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본 문학 번역가다. 에쿠니 가오리,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등 내로라하는 일본 작가들의 주요 작품이 그녀의 손을 거쳐 한국에 소개됐다. 그렇게 숱한 작품을 번역해 온 지 20여 년 만에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풋풋한 청춘영화 ‘모모세, 여기를 봐’(원제 百<702C>、こっちを向いて, 10월 30일 개봉, 야쿠모 사이지 감독, 이하 ‘모모세’)는 그가 처음 시도한 영상 번역이다. 감성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그의 문장은 스크린에서도 빛이 난다.

-김난주의 영상 번역이라니. 놀랍고도 반가운 소식이다.

“‘모모세’ 수입사에서 번역 일을 의뢰해왔다. 해본 적 없는 일이라 살짝 고민했다. 한편으론 설렜다. 아무래도 번역을 업으로 삼다 보니, 외국영화를 보면 늘 자막에 관심을 가지고 보곤 했다. ‘왜 저렇게 했지?’ 싶을 때도 있고 ‘정말 기발하다’며 놀랄 때도 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기에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도전하게 됐다. 지난 추석 연휴 때다.”

-영화 ‘모모세’를 본 느낌은 어땠나.

“요즘 일본영화는 잔잔한 분위기가 대부분이다. ‘모모세’도 그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영화다.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는데 왠지 모를 그리움에 젖게 한다. 노보루와 계약 연애를 하는 모모세가 처음엔 좀 못되고 이기적인 아이로 그려지는데, 나중에는 그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설명된다. 모모세뿐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이 확실한 자기 성격을 가지고 움직이는 영화란 점이 좋았다.”

-소설을 번역하는 작업과는 어떻게 달랐나.

“문학 작품을 번역한다는 건, 작가가 빼놓은 부분까지 메워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대사가 아니라 영상 자체가 중요하지 않나. 그러다 보니 인물들이 하는 말을 다 담긴 하지만 행간 사이의 의미를 메우고 보완하는 것까지는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군더더기를 쳐내야 한다. 소설 번역은 시간을 두고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수정할 수 있는데, 영화는 자막 번역 이후에도 해야 할 후반 작업이 많기에 아무래도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모모세’는 10대가 주인공인 영화라 10대만의 은어, 비속어가 있었을 텐데.

“출판 언어는 아무래도 견고하고 딱딱한 편이다. 소설을 번역하던 버릇대로 자막을 만들어서 보냈더니, 수입사 측에서 몇몇 단어를 바꿔도 되겠냐고 하더라(웃음).”

-어떤 단어를 바꾸자고 하던가.

“나는 사실 ‘찌질이’ 정도로 하고 싶었는데 ‘찐따’로 번역된 단어가 있다(웃음). ‘찐따’의 뜻을 정확히 찾아본 후, 정말 청소년들이 많이 쓰는지 조사했다. 여기저기 많이 물어봤는데,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쓴다고 하더라. 그럴 경우에는 내가 모르고 있었던 거니까 고치자는 의견을 받아들인다.”

-은어나 비속어에 대해서 주로 누구한테 물어보나.

“일단 20대인 두 딸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집안 사람들, 지인들을 총동원해서 그 또래를 찾아 물어본다. 영화 자막은 훨씬 탄력적이어서 그런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경희대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일본 쇼와여대 대학원에서 일본 근대 문학을 공부했는데 일본 문학 번역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는 뭔가.

“번역 일을 생각하게 된 건 문학을 공부할 때가 아니라 둘째 딸을 낳았을 때다. 둘째가 울지도 않고 무척 순해서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아이를 돌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각수의 꿈』(원제 그대로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을 읽었다. 이 책을 꼭 번역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출판사와 계약도 하지 않은 채 혼자서 번역을 시작했다. 그게 번역가로서의 첫 걸음이 됐다.”

-지금까지 번역한 책이 얼마나 되나.

“단행본만 300권이 넘을 것이다. 그림책도 많이 했으니까 상당히 많을 거다. 정말 쉴 틈 없이 일을 했다(웃음).”

-그렇게 많은 작업을 하면서 번역가로서 세운 원칙이 있다면.

“예전에는 그 원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해’라고 매뉴얼을 만들어가며 작업했다. 그런데 정작 하나도 쓸모가 없더라. 왜냐하면 새로운 작품을 의뢰받을 때마다 그건, 이전의 매뉴얼을 적용할 수 없는 새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들어 둔 매뉴얼을 다시 펼치는 순간 거기에 얽매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좀 더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은 상태에서 작품과 좀 더 자유롭게 소통하려고 한다.”

-일본 소설 중에서 영화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있나.

“가네시로 가즈키의 『연애소설』이란 작품 중 한 에피소드로,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가 옛사랑이 남긴 유품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을 그린 이야기다. 물론 내가 번역했다(웃음). 요즘 할아버지들은 예능 프로그램이나 코미디영화에서 주로 활약하던데, 애잔한 사랑 이야기도 괜찮지 않을까.”

-영상 번역은 앞으로도 계속 할 생각인가.

“워낙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집에서 수시로 챙겨 보고, 극장에서 곧 내릴 것 같은 영화는 일부러 찾아가서 보는 편이다. 그래서 ‘모모세’ 자막 작업이 참 즐거웠던 것 같다. 또 기회가 생긴다면 호기심과 설렘으로 도전해야지.”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접하는 번역가의 입장에서 김난주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 좋은 영화의 기준이 궁금하다.

“‘재미’다. 하지만 볼 때는 분명히 재미있었는데 책을 덮으면 기억이 안 나는 소설, 극장에선 정신없이 봤는데 끝나는 순간 다 잊게 되는 영화는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계속 되짚어 생각해 볼 것이 있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 같다. 흑백영화인 ‘로마의 휴일’(1953, 윌리엄 와일러 감독)을 지금 딸과 함께 봐도 재미있는 것처럼 말이다.”

‘모모세, 여기를 봐’ 소설가가 된 노보루(무카이 오사무)는 모교에서 강의를 제안 받고 15년 만에 고향을 찾아 학창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고등학생 노보루(타케우치 타로)는 내성적이다. 말주변도, 존재감도 없다. 이런 그가 미야자키 선배(쿠도 아스카)를 만나러 도서관을 찾았다가 선배와 함께 있던 모모세(하야미 아카리)를 보게 된다. 예쁜 여학생의 등장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노보루는 뜻밖의 부탁을 받는다. 모모세가 그에게 “오늘부터 나랑 사귀는 것처럼 연기하자”고 한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일본에서 크게 인기를 끈 나카타 에이이치의 동명 소설이다. 계약 연애로 시작된 첫사랑이 남긴 소중한 기억과 상처를 잔잔히 그려내면서, 시종일관 따뜻하고 유쾌한 정서를 유지한다.

글= 임주리 매거진M 기자
사진=정경애(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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