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줄 똑바로 안 그으면 불안하다는 대학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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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완벽주의가 부른 강박

(밑줄에 집착하는 대학 4학년) 수학을 전공하는 대학 4학년생입니다. 고등학교 때 자를 대고 밑줄을 긋는 습관이 생겼는데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고등학교 때는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이건 동그라미, 이건 세모”라는 식으로 중요 부분을 설명하면 꼭 무늬 자를 이용해 반듯하게 그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모습이 싫으면서도 습관을 도저히 바꿀 수가 없습니다. 혹시 너무 엄격한 부모 아래서 자랐기 때문일까요.

(자 안 쓴지 수십 년 된 윤교수)우리는 완벽함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습니다. 생존과 성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니까요. 자를 사용해 정확하게 선을 긋는 건 완벽을 추구하는 경향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좀 모순된 듯 하지만 적당히 완벽을 추구하는 건 인생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지나친 완벽주의는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 아니라 일의 효율마저 떨어뜨립니다. 예컨대 책을 읽을 때 때론 전체적 윤곽만 잡고 후딱 읽은 후 중요 부분만 다시 읽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죠. 하지만 완벽주의가 심한 사람은 꼼꼼히 다 읽기 전까진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이걸 ‘강박적 느림’이라고 합니다.

 강박은 불안과 관련한 증상으로, 그 행동을 안 하면 불안하기 때문에 꼭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적으로 하곤 합니다.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면 불안을 증폭시키고 그 불안을 막기 위해 강박 행동을 하는 거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강박증 환자로 나오는 주연 잭 니콜슨은 길을 걸을 때 꼭 선을 피해서 걷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사연주신 분 말대로 부모의 엄격한 훈육 스타일이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부모는 내 자녀가 반듯하고 강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엄격하게 양육합니다. 그러나 칭찬이라는 보상이 없는 건조한 훈육은 자녀의 마음 속에 완벽을 향해 내달리는 통제 시스템을 만들게 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이게 강박적 행동으로 이어지고요.

02. 강박에서 탈출하는 법

전에는 얼마든지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생각에 자 없이 밑줄을 그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자를 대고 밑줄을 긋게 되더군요. 자를 대지 않고 밑줄을 그으면 무척 불안하고 우울해서요. 삐뚤게 그은 부분이 계속 눈에 아른거려 딴 일을 못할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결국 다시 자를 대고 긋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런 강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강박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 행동을 해야만 불안감이 잠시 누그러지기 때문입니다. 강박 행동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 해도 불안감만 커지기 때문에 그 행동을 끊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불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요. 강박 행동을 줄이겠다고 강박 행동과 싸우는 건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안만 더 커집니다, 강박 행동과 싸우지 말고 불안을 줄여줘야 합니다.

 불안에 대처하는 의연한 태도는 훈련을 통해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습니다. 불안은 일종의 자기 협박입니다. 협박이란 상대가 그걸 무서워할 때 힘을 발휘하죠, 협박했는데 별 반응이 없으면 협박범은 오히려 당황합니다. 불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할 때 너무 억누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불안아, 날 걱정해 주는 건 잘 알겠는데 오늘은 에너지를 다른 소중한 곳에 사용할게’라고 다독이는 게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전문용어로 ‘수용전념’이라는 불안관리법입니다. 불안을 없애려고 하지 말고 불안하든 말든 오늘을 가치 있게 사는 데 목표를 두는 겁니다. 이 작은 차이가 삶의 철학에 큰 변화를 불러옵니다. 불안이란 곧 죽음의 공포인데, 죽지 않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매일 가치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불안이라는 협박은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강박도 줄어듭니다.

 만약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안되면 전문가를 찾아 가는 게 좋습니다. 강박이 이미 강력하게 들러붙었다면 사실 혼자 힘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약물 치료와 심리적 접근을 병행해야 효과적입니다.

03. 원칙이냐, 융통성이냐

한 가지 더 궁금한 건 강박이 혹시 융통성과도 상관 있는 건가요.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종종 받거든요. 한번은 교생 실습 나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오늘 학생부장 선생님이 마련한 회식에 참여하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영어 학원 가야해서 못 간다”고 빠졌습니다. 교생 중 저만 빠졌더라고요. 회식 자리에서 다들 저를 보고 융통성 떨어진다고 했다네요. 융통성이 부족한 게 아니라 원칙을 중시하는 성실한 사람 아닌가요. 요령 피우며 잔머리 잘 쓰는 게 융통성인지 헷갈립니다.

강박적 행동의 뒤에는 완벽을 추구하는 아주 명확한 옳고 그름의 원리 원칙이 있습니다. 남들 눈에는 당연히 융통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일 수 있죠. 융통성의 사전적 의미는 그때 그때 사정과 형편을 봐서 일을 처리하는 재주, 또 일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는 재주입니다. 옳고 그름보다 일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거죠. 원리 원칙을 중요시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얄밉기까지 한데, 사회에선 이런 사람이 더 인정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융통성이 있으려면 삶의 가치를 판단할 때 효율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옳고 그름이 가치 판단 기준이라면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원도 옳지 않다고 판단하면 활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답답하다는 얘기는 들어도 대개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습니다. 반면 융통성이 지나치면 넘어야 할 선을 넘어 스스로를 망치기도 합니다.

 융통성이 먼저냐, 아니면 옳고 그름이 먼저냐, 라는 질문은 우문입니다. 각기 장단점이 있고 사회는 이 둘의 균형이 중요하니까요. 사연주신 분은 성실함을 융통성과 대비했죠. 엄밀하게 융통성과 성실성은 반대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가치 판단 면에서 서로 반대되는 심리 행동 패턴이라 볼 수도 있겠네요.

 성실이 중요하냐, 융통성이 중요하냐, 이런 질문도 원리 원칙적 사고에 기반한 거겠죠. 사실 둘 다 갖고 사는 게 정답입니다. 남과 더불어 살기 위해선 공감이 중요한데, 이 둘이 모두 작동해야 공감도 가능합니다.

 이미 사연 속엔 융통성을 보완하고픈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삶에 변화를 주자니 불안한 거겠죠. 과감하게 변화를 주세요. 물론 옳고 그름이 똑부러진 것도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심리적 균형도 필요합니다. 약간의 융통성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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