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백년」의 주역들(17)「대한인국민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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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912년11월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시 페리가의 한 3층건물에 모인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에서 온 1백여명의 해외거주 한인대표자들은『대한민족의 복리도모와 국권회복을 위한 범민족적 자치기관을 설치할 것』에 의견을 같이 했다. 그리고 『교육과 실업을 진발하고 자유와 평등을 제창, 동포의 명예를 증진하며 조국독립을 광복함』에 목적을 둔 대한인국민회를 창립했다.
민주주의에 의거, 종교와 계급을 초월한 자유 평등이념에 입각한 준정부형태의 기관으로 중앙총회와 4개의 지방총회 그리고 l백l6개의 지방회로 구성된 범민족적 기관이었다.
초대 중앙회장엔 도산 안창호가 피선됐다.
이로부터 대한인 국민회는 해외거주 한인의 유일한 대표기관으로 활동, 특히 미주에서는 한인에 관계되는 거의 모든 일을 국민회를 통해 처리했다.
대한인 국민회는 창립 이후 즉각 재미한인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간섭을 배격하는 일에 착수했다. 한일합방으로 한국을 속국으로 만든 일본은 해외거주 한인도 일본정부의 통제를 받도록 해외거주 한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려 했던 것.
19l3년6월 캘리포니아 헤메트지방에서 영국인 소유, 살구농장에 근무하고 있던 한인노동자들이 일인으로 간주되어 부당히 쫒겨 났었다(당시 캘리포니아 지방에는 일인노동자 배척이 심했다). 이에 일본영사가 간섭하려하자 한인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국민회에 사건의 중재를 요청, 대한인 국민회가 한국인의 유일한 대의기관임을 분명히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는 미국무장관「브라이언」에게 공한을 보내『재미한인들은 거의가 한일합방전에 고국을 떠난 사람들로 한국이 일본의 속국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해가 하늘에 떠 있는 한 일본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한인과 일인을 구분, 한인에 관한 문제는 반드시 한인사회와 교섭해줄 것』을 주장, 그로부터 이를 수락하는 답신을 받았다.
재미 한인사회단체의 시작은 1903년 최초의 이민이 하와이 땅에 발을 내리면서부터 시작된다.
생전 처음보는 낯선 땅에서의 생활은 그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동포애와 집단의식에 눈뜨도록 했고, 농장별로 동회가 조직됐다. 마치 현재의 계와 비슷한 조직이다. 그러나 하와이한인 조직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1905년 무렵에는 모두 28개나 되는 혼란을 보였다.
이를 하나로 통일한 것이 l907년9월에 조직된 한인합성협회. 하와이 한인합성 협회는 회원수 1천51명으로 호놀룰루 릴리하가에 회관을 설립하는 한편, 기관지 『한인합성신보』를 발간했다.
회원 모두 예납금(회비)으로 연2달러50쎈트를 냈다. 합성협의 지도자들은 통합운동을 하와이 뿐 아니라 미국 본토에까지 확대시키기로 하고, 본토의 가장 큰 한인단체인 공립협회와 접촉을 시도했다.
공립협회는 l903년 9윌 안창호등이 발족한 상항친목회가 확대발전된 것.
당시 샌프란시스코 거주 한인은 25명으로 회원들은 주로 인삼장수 아니면 유학생들. 그러나 1905년부터 캘리포니아 지방에 미작붐이 일어나면서 하와이 한인중 사탕수수농장을 이탈, 본토로 들어오는 농부들이 늘어 회원수가 크게 늘기 시작했고, 1905년4월에는 그 명칭도 공립협회로 바꾸었다.
공립협회는 설립강령이 동족상애·환난상부·항일운동으로 미본토에 세위진 첫번째 한인정치단체. 기관지인『공립신보』를 창간하고, 미국내에 6개지방회를 두었으며, 1908년 시베리아에 원동지회, 만주에 만주지회를 설립하는등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l909년 2월 양단체 대표자들은 통합한 새 조직 국민회를 발족시켰다.
미주 동포들은 이 단체의 창립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특히 하와이에서는 전 한인이 이날만은 휴업, 집집마다 태극기를 꽂았으며, 호놀룰루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1천여명의 한인들 그리고 하와이 정부당국에서도 많은 요인들을 참석시켜 대성황을 이뤘다. 초대 하와이 국민총의장에는 정원명, 북미국민총회장엔 정재관이 각각 선출됐다. 새로 출범한 국민회는 미주뿐 아니라 타지역의 한인조직도 흡수하기 위해 노력, 시베리아·만주에도 지방회를 세웠다.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이렇게 네곳에 지방총회를 갖게된 국민회는 l912년11윌 4개 지방총회의 대표들을 샌프란시스코에 소집,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를 설립하고 안창호롤 초대회장으로 뽑았던 것이다.
그후 대한인 국민회는 1920년10윌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명의로 발표한 교민단영에 의해 해체되어 대한인 교민단으로 변경돼 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속하게 됐다. 그러나 명칭과 조직만은 임시정부의 양해하에 그대로 유지됐다.
글 정 우 량 기자
사진 채 흥 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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