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구리선 통화 43년, 북 철모 경비 4년 … 시간이 비껴간 판문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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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2012년3월 판문점 북측 판문각에서 남측 지역을 살펴보고있다. [사진=노동신문, 중앙포토]
남북 직통전화와 팩스. [사진=노동신문, 중앙포토]

“전통문이란 게 뭡니까. 어떻게 남북이 주고받는 건가요.”

 현장취재 때 많이 받는 질문입니다. 회담이건 기싸움이던 남북 간 소통을 할 때 뭘로 하는지 궁금하다는 말씀인데요. 얼마 전 판문점 방문 때 이 대목을 꼼꼼히 취재했습니다. 한마디로 남북 직통전화를 통해 문서나 메시지를 주고받는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간단한 문건은 팩스로 보냅니다. 긴급한 사항은 상대가 불러주는 걸 메모해 서울·평양에 즉각 보고하죠. 이산상봉 서류 같은 두툼한 문서는 군사분계선상의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등에서 만나 주고받습니다. 이럴 경우엔 ‘판문점 채널로 교환했다’란 표현을 쓰죠.

 놀라운 건 1971년 9월 5개 회선의 남북 직통전화가 개통된 지 43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이란 점입니다.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 자리한 통일부 전방사무소는 연락채널의 중심축인데요. 맞은 편 북측 판문각에 구리선 직통전화와 팩스로 연락합니다. 오는 30일 열자고 제안한 남북 고위급 접촉의 회신도 북한이 이 경로로 보내올 것으로 판단해 당국자들은 매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북한은 국방위 항의서한 같은 군부관할 문건은 별도의 군사통신선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판문점 연락관으로 불리는 베테랑 직원들은 오전 9시 “귀측(북한) 안녕하십니까”라며 ‘개시통화’를 하고 오후 4시엔 ‘마감통화’를 합니다. 어쩌다 “오늘은 전달 사항이 있으니 대기해주시오”라고 북측이 요청하면 ‘연장근무’에 돌입하죠. 뭔가 중대한 발표가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비밀내용이 많다보니 ‘연락관은 입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죠.

 남북한 군과 유엔사가 공존하는 판문점은 일반인들에겐 접근 불가 지역입니다. 2005년7월 군사실무회담 때 북측 단장인 유영철 인민무력부 대좌가 뇌졸중으로 실려나간 일이 있습니다. 그를 태운 우리 군 앰블런스가 군사분계선을 넘는 상황까지 벌어졌지만 당시 언론엔 한 줄도 실리지 않았죠. 그만큼 철통 보안이 가능한 곳입니다.

 더 많은 비밀을 판문점은 알고있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 때 대북밀사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72년 5월2일 판문점을 넘어가 김일성을 만났습니다. 같은 달 29일 박성철 남북조절위 북측위원장 대리는 청와대로 와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했죠.

2000년 첫 정상회담 물밑 주역인 임동원 국가정보원장도 회담 개최 한 달 전인 그 해 5월 이 곳을 거쳐 방북했는데요. 얼마나 더 많은 남북 인사들이 오갔는지, 지금은 누가 오갈지 판문점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습니다.

 이 곳은 체제경쟁의 최일선입니다. 1970~80년대 표류 어부나 군인들은 북송될 때 우리측이 준 옷과 선물을 던져버리고 팬티차림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즘엔 그런 일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한 관계자는 “가끔 남측을 향해 ‘김정은 원수님 만세’를 외치기도 하지만, ‘생계형’으로 보여 안쓰러울 때가 많다”고 귀띔합니다.

 판문점은 두 얼굴입니다. 냉전시기 치열한 남북 체제대결 때는 피비린내가 풍겼죠. 76년 8·18 도끼만행사건으로 미군 장교가 살해됐을 때가 최악이었다고 합니다.

햇볕정책과 교류·협력의 열기로 들뜬 때도 있었죠. 98년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을 위해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옆 산비탈에 트럭이 다닐 임시도로를 내기도 했는데요. 북한 군부는 “우리가 어떻게 지킨 분계연선(휴전선)인데 남조선 재벌노인과 소떼 무리가 짓밟고가게 하냐”며 볼멘소리를 했다는 후문입니다.

 10년 가까이 반짝했던 남북 간 화해무드는 이제 추억이 됐습니다. 4년 전 북한의 천안함 도발로 5·24 조치를 발표하자 북한은 긴장수위를 올렸죠. 그 때 판문점 북측 경비병들은 철모로 갈아쓰고 나왔는데요.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에 자리한 판문점은 서울에서 불과 60km 거리입니다. 평양에선 180km 남쪽이죠.

널문리라 부르던 마을이 정전협정 장소가 되면서 판문점(板門店)으로 굳어진 건데요. 군사분계선의 동서 800m, 남북 400m인 장방형 ‘공동경비구역(JSA)’은 남북 분단의 상징으로 굳어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미래연합 대표 때인 2002년 5월 방북해 판문점으로 돌아왔습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도 2012년 3월 이 곳을 찾았죠.

‘통일대박’을 화두로 던진 박 대통령. 그리고 ‘북남관계 돌파구’가 필요한 김 제1위원장. 두 최고지도자는 언제, 어떻게 판문점을 가로지를 수 있을까요.

이영종 외교안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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