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혈전|쌀파동계기로 본 「국제상인」들의 생리와 실태<5>|플랜트 수주전|기술·자재파는 「반타작」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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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내의 큼직한 공장이나 공사치고 외국기술과 시설재가 안쓰인 것은 거의 없다. 플랜트나 공사를 따기위해 세계굴지의 종합상사·엔지니어링회사·기계메이커들이 불꽃튀는 각축전을 벌인다.
플랜트수주는 「꿩먹고 알먹는 격」의 실속있는 장사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줄줄이 장사거리가 나올뿐아니라 이윤폭도 높다.
요즘은 덜하지만 60연대에 한창 공장을 지을땐 공장값의 25∼50%를 남겨먹기도 했다.
그만큼 황금시장이었다. 파는측에서 보면 한국은 「어리숙한 봉」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수주전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혹하고 치열하다.
여러 사업장의 방법이 백출할뿐 아니라 때로는 외교력까지 동원된다.
공장이 웅자를 드러내고 화려한 준공식을 갖기까지는 갖은 「줄」과 수단이 다 동원된 한판픙부와 승자와 패자의 희비드라머가 벌어진다.
그중에도 내외자 1조8천9백억원이 들어간 포항제철 건설은 상전의 대표적 드라머다. 포철은 4기로 나누어 건설했다. 연조강능력 1백3만t규모의 1기설비는 외자를 모두 일본차관에 의존한 때문에 설비도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왔다.
일본 메이커끼리 치열한 경합이 붙었다.
공사마다 2∼3사씩의 응찰 적격업체를 정하여 입찰에 붙이는데 적격업체선정이 전초전이 된다. 워낙 로비가 심해 포철이 휘말릴뻔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일본 메이커들은 그들대로 갖가지 방법을 동원, 접근하는 한편 국내유력자에게 줄을 대 압력도 넣었다. 외압보다 내압이 더 힘들었다고 실토할 정도다. 어떤 땐 높은데 불려가 야단도 맞고 모함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건에 몇백만달러가 왔다갔다하는 상담이라 공략하는 측이나 방어하는 측이나 결사적이다. 만약 조금만 선심을 썼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포철은 있을수 없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상담하나 잘못하면 부실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고비였다는 것이다.
1기공사는 일본세가 독점했지만 2기공사사 이후는 미·독·오스트리아·벨기에·영국·프랑스의 유명회사들까지 겹쳐 대혼전을 벌였다. 플랜트상담은 발주 - 견적서제출 - 응찰적격업체선정 - 입찰 - 최종시공자 또는 설비공급자결정으로 연결된다. 또 금액도 크고 탄력적이다. 그만큼 이면사가 많을 수 밖에 없다.
한국의 플랜트시장이 커짐에 따라 수주상전의 단골손님도 국제적이다.
그중에도 미국의 벡텔사(엔지니어링부문)·플라워사(석유화학·비료)·맥더모트사(석유화학), 프랑스의 테크닙사(지하철), 서독의 지멘스사(전자교환기), 전기·종합기계부문에서 미국의 GE사·WH사·컴버스천엔지니어링사, 일본의 삼능중공업·일립제작소·천기중공업·일립조선·IHI·신일본제철, 프랑스의 프라마통·알스톰, 서독의 루르기사, 영국의 퍼슨즈사 등이 유명하다.
이들업체는 고도의 기술과 정보망을 무기로 세계도처를 종횡무진 누빈다.
이들은 경제뿐아니라 정치기상도까지 추적·분석하고 있다. 마지막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실력자의 계보는 이들이 가장 알고싶어하는 정보다. 어느 국가에서 어떤 종류의 플랜트가 발주될 것 같다는 정보를 거의 동시에 입수한다. 메이저(국제석유재별)나 세계 톱랭커종합상사에 비견할 수있는 실력자들이다.
따라서 정보입수단계에서부터 맹활약을 시작하는 것이 통레. 일단 정보를 입수하면 발주예정인 플랜트의 설계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자사에 유리하도록 설계를 유도하기까지 한다.
이제 겨우 카피(복사)플랜랜트의 수출단계가 있는 우리기업들이 이같은 거장들과 해외에서 경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벌써 단위가 다르다. 이들 매머드기업과 경쟁한다기 보다는 우리의 기술수준에 맞는 하위플랜트를 수주하는 단계다. 토목이나 건설은 그런대로 한판승부가 되나 플랜트는 아직 이르다.
지난해 플랜트수출실적은 10억달러 정도인데 송배전·철구조물·담수화·건설하역·저장설비 등이 대부분이다.
선진국과 기술수준의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그나마도 해외수주에는 설움이 많다는 것이 업계의 솔직한 고백이다.『과연 플랜트를 지어봤느냐』는 식의 우롱우진의 면박도 많이 듣는다.
또 한국업체들은 연륜이 짧기 때문에 특기가 없다. 그래서 백화점식으로 모든걸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면 『당신들은 실적도 없으면서 모든걸 다할 수 있다니 신이냐』하고 묻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공사엔 외국회사와 공동으로 수주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최근의 플랜트수주각축장은 중동산유국·선진공업국·개도국들의 유명업체들이 총집결, 수주상전을 벌이고 있다. 이 때문에 정보원·에이전트들이 성황을 이룬다.
에이전트의 경우 입찰에 성공하면 수주액의 2∼4.5%의 커미션을 받는다.
왕족이나 실권자들과의 가교역할이 에이전트의 주요업무이기 때문에 성사를 위해서는 이들을 활용할 수 밖에 없다. 이권이 큰 만큼 허허실실도 많다. 더러는 속이기도 하고 더러는 속으면서 약육강식의 상전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국제입찰엔 별의별 기기묘묘한 방법이 다 동원된다.
가짜 응찰가격을 흘리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본사와 현지간에 평문으로 탤렉스를 치기도 한다.
물론 꼭 지켜야 할 것은 미리 암호를 정해 통화한다.
또 미신도 많다. 입찰서가 작성되면 모두가 한번씩 밟고 지나가고 인찰서를 내러 갈땐 2대의 자동차를 즌비한다. 한대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예비용이다.
한국이 플랜트수주에 약한 것은 기술수준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문엔지니어링업체가 태부족인 것도 큰 원인이다.
이름뿐인 회사는 많지만 세계적 규모의 플랜트를 소화할 만한 회사는 많지 않다.
일본에는 전문엔지니어링사만도 4백여개나 된다.
일본의 경우는 화학·전기·기계등 분야별로 수주전문업체가 많은 것도 우리와 크게 비교된다.
더구나 일본은 엔지니어림사별로 특정국가에서의 지명도가 다르기 때문에 라이벌업체라도 지명도 높은 업체와 손을 잡고 수주경쟁에 나서는 관례가 확립되어 있다.
우리의 기술·수주능력을 감안하면 해외 플랜트수주에는 당분간 외국업체와 공동으로 참여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사도 따고 기술축적도 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해에 10억달러 짜리 플랜트공사를 리비아에서 딸 수 있었던 것도 한일간의 공동작전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김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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