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95% "스트레스 느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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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에 은행 이사가 된 A씨는 억대의 연봉을 받는 직장인이었다. 그는 지난해 말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둔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유족들이 신청한 산재 인정 소송과정에서 밝혀진 자살의 원인은 거의 매일 오후 10시 넘어 퇴근하는 과중한 업무와 원치 않는 술자리, 골프 모임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였다. A씨는 자살 전 정신과에서 불안.우울증을 동반한 적응 장애 진단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통신회사인 K사에 다니는 B씨는 최근 2년 동안 아홉 차례나 인사 발령이 났다. 회사 측이 구조조정 대상 직원들을 상품판매팀이라는 새 조직을 만들어 발령한 뒤부터 B씨는 적응할 겨를도 없이 이곳저곳을 옮겨다녀야 했다.

B씨는 "지방으로 발령 나 가족을 두고 혼자 생활할 때는 괜히 우울해졌고 밤에 악몽을 자주 꿨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까지 얻었다"며 산재를 신청한 상태다. 이 회사에는 이미 정신병으로 산재를 인정받은 사람이 4명이나 된다.

구조조정, 승진 경쟁, 연봉제 등으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업무상 스트레스가 직장인들의 건강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해 기업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실제로 우울증과 적응 장애 등 정신질환으로 인한 산재 승인 건수는 2000년 27건에서 지난해 104건으로 늘어났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인 뇌졸중.심장병 등 뇌심혈관계 질환 산재 승인 건수도 2000년 1950건에서 지난해 2285건으로 증가했다.

인터넷 취업 포털 '잡링크'가 지난 4월 직장인 2083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81.7%(1702명)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질병을 앓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스트레스의 정도가 심해 병원 등에서 치료받은 적이 있다'는 응답도 39.6%(674명)나 됐다.

한국직무스트레스학회가 2001년 조사한 우리나라 직장인의 스트레스 보유율은 95%로 미국(40%), 일본(61%)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특히 국내 직장인의 22%는 고위험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스트레스는 국가경제에도 심각한 피해를 주고 있다. 산재와 의료비 지출이 늘고, 직장과 업무에 대한 근로자의 애정이 식어 기업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인제대 백병원 스트레스센터는 스트레스로 인한 피해액을 추정한 결과 2003년 국내총생산(GDP) 손실이 최소한 11조365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인제대 우종민 교수는 "업무와 관련 있는 정신 관련 질환 고위험군 비율(전체 인구의 4.6%)에 미국 산업안전보건원의 정신질환 고위험군 생산성 저하율(30~50%)을 적용한 직접 손실액"이라며 "개인적인 의료비까지 감안하면 손실액은 더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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