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런던타임즈 기자 「로버트·래시」가 4년간 취재한 비화(4)|지하드(성전)선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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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차 중동 전 발발직후의 분위기는 강경 아랍국가들의 과격한 조치를 사우디아라비아가 온건정책으로 억제하는 일반적인 패턴을 계속 반영하고 있었다.
비교적 부드럽고 점진적인 석유감산조치야말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재정적 타격을 받지 않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는 것을 막으면서 동시에 아랍측에 전세를 유리하도록 유도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파이잘」왕은 믿었다.
그래서 73년10월16일 상오9시30분에 발표된 성명서는 아랍산유국들이 즉시 10%감산을 하고 이 분규가 아랍 측이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 매달 5%씩 추가 감산한다는 요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아랍 측에 대해 효과적인 지원을 해주는 우호국가에 대해서는 석유공급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에 반대하는 적극적 조치를 취하는 나라도 같은 처우를 받을 것이다』라고 이 성명서는 덧붙이고 있었다.
「파이잘」왕은 이 성명이 발표된 직후 「닉슨」 미국 대통령에게 「사카프」국무 상을 특사로 보내 친서를 전달했다. 「파이잘」왕은 이미 그 전주부터 소련이 시리아와 이집트에 대해 샘-6지대공미사일을 포함한 군수물자를 공수하기 시작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이에 대항해서 이스라엘에 군수 물자를 제공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는 4대 석유회사 회장들을 동원해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하면 아랍온건국가들과의 관계가 심각한 상태로 악화될 것』이라는 내용의 의견서를 미국 정부에 전달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이때「닉슨」은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수렁 속에 빠져있었고 백악관참모로 있던「헤이그」장군은 3일 동안 이 의견서에 대한 회답을 연기함과 동시에「사카프」특사와의 면담도 미루고 있었다.
「키신저」는 중동전이 이집트군의 선공으로 시작되었을 때 이것을 중동문제해결의 새로운 기회로 파악했었다. 그는 개전 초기에 이스라엘에 대한 군원을 일부러 지연시키기까지 했다.
그는 시나이전선에서의 이집트군의 진격이 유지되도록 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67년 전쟁에서 비롯된 이스라엘의 오만을 약간 누르고 반대로 아랍 측이느껴 온 모욕감을 덜어주어 서로간에 대화가 보다 순조로와 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아랍 측에 공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와 같은 전략가다운 계산은 무산되고 중동전이란 미국과 소련세력간의 대결에 지나지 않는다는 단순논리가「키신저」를 사로잡고 말았다.
그 당시의 키프로스관제탑 기록을 보면 소련수송기는 가장 많은 날 하루60대가 비행했다. 또 서방측 레이다가 탐지한 바에 따르면 이들 수송기는 반이 비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언론은 하루 수백 대가 아랍 측에 군수물자를 수송하고 있다고 보도해서 미국여론을 들끓게 했다.
「키신저」는 보다 복잡한 중동문제의 현실을 도외시하고 또다시 소련과의 투쟁에서 미국이 양보할 수 없다는 단순논리에 따라 사태에 임하기 시작했다.
73년10월15일 군수 물자를 싣고 기다리고 있던 미 공군수송기에 이륙신호가 내려졌다.
이틀 후 「사카프」특사는 겨우「키신저」와 면담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키신저」는 지극히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이번 휴전에서는 아랍 측이 보인 용기와 전과를 반영시켜야될 것입니다. 우리도 중동에서의 새로운 현실을 인정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다음날「닉슨」을 만났을 때도「닉슨」은 『우리 두 나라의 국가 이익을 감안해서 외교정책을 밀고 나가겠다』고 다짐했고 기자회견에서는『평화롭고 공정하고 명예로운 방향으로 전쟁을 수습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카프」특사는 이런 워싱턴의 분위기를 종합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점진주의 정책이 효과를 거둔 것 같다는 지극히 낙관적인 보고를 「파이잘」왕에게 했다.
그러나 「파이잘」왕이나 「사카프」는 계속되는 소련의 아랍지원이「닉슨」과「키신저」의 냉전심리를 어느 정도 자극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미국지도층은 그들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위협했던 석유금수조치의 가능성을 과소평가 한 듯 하다.
여하튼「닉슨」은「파이잘」왕의 특사를 맞아 유화적인 발언을 한 다음날인 10월18일 이스라엘에 대한 긴급 군사원조 22억 달러의 승인을 의회에 요구했다.
이 폭탄선언이 발표되자 미국무성은 이것이 소련이 아랍 측에 보내는 군원에 대해 균형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성명했다.
그러나 22억 달러란 엄청난 액수는 소련의 원조에 대한 「균형」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런 목적을 위해 요구한 원조액수는 8억5천만달러에 지나지 않았는데「닉슨」은 『한번 해볼테면 해보자』며 거의 3배의 액수를 책정했던 것이다.
이 결정은 1주일 후「닉슨」이 미군에 핵 경계령을 내린 조치와 마찬가지로「과잉반응」 이었는데「키신저」의 한 보좌관은 두 조치가 모두『「닉슨」다운 짓』이라고 후에 논평했다. 후에 쓴 회고록에서「닉슨」은 이해 10월과 11월 사이 미 공군이 실시한 5백50회의 공수작전은 48년과 49년 사이의 베를린공수작전보다도 더 큰 규모였다고 자랑했다.
「키신저」만은 이 결정을 내린 지 1주일 후에 『실수했다』고 자인했으며 최근에는 『지나 놓고 보니 잘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이 결정 때문에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가 큰 희생을 치르게됐다.
「파이잘」왕은 자신의 특사에겐 호의적인 메시지를 보내놓고는 사전경고도 없이 이스라엘 군원을 엄청나게 증강한 미국의 조치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또 이 같은 아랍강경론자들을 무마하려던 사우디아라비아의 온건정책의 명분을 짓밟아버리는 조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동아랍국 중 미국과 가장 가까운 친구는 하루아침에 격렬한 적으로 번해버렸다.
10월19일 하오9시 TV뉴스시간에 맞춰 「파이잘」왕은「지하드」(성전)를 선포했다. 성전의 일환으로 대미석유공급을 즉각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한 노인의 분노는 상상도 못할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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