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내 안의 김 일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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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말은 하는 것 못지않게 듣기가 중요하다. 우리말에 '말귀'란 말이 있을 정도다. 말을 할 때는 '씨'가 먹히게 해야 한다. 듣기와 하기 사이에 말길이 트여야 모듬살이가 안정되고 활기차다.

상담심리전문가 양국선씨(sangdam4u@naver.com)는 말귀의 수준을 몇 단계로 나눴다.

예를 들어 아들이 엄마한테 "엄마, 나가세요. 노크도 없이 막 들어오시면 어떡해요"라고 했다고 하자. 이때 엄마는 ①"엄마가 자식 방에도 못 들어가니? 조그만 게 무슨 비밀이 있다고" ②"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와 화가 난 모양이구나" ③"너도 이제 컸으니 너만의 세계를 갖고 싶은 게로구나"의 반응을 보일 수 있다.

①은 상대방의 표면적 감정조차 못 들은 경우다. 이때 엄마와 아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②는 상대의 표면감정을 듣긴 했는데 내면적 감정엔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경우다. ③은 표면감정과 내면감정을 정확히 듣고 상대방의 성장동기까지 이해하는 반응이다.

씨가 먹히는 말하기는 어떤 건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때 주어를 나로 하는 '나-전달법(I-Message)'이다. 내 느낌의 책임을 나라고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반면 내 느낌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너-전달법'은 상대에게 죄의식을 갖게 한다.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할 때도 많다. 그렇게 되면 무슨 말을 해도 씨가 안 먹힌다.

이를테면 군대 생활의 농구시합에서 선임 상병들이 열심히 응원하는데 후임 일병이 하는 둥 마는 둥 했다고 치자. 그럴 때 상병은 일병에게 "네가 대충 하니까 나도 힘이 빠진다. 같이 하자(나-전달법)" 라는 것과 "일병 달면 군 생활 다 끝나는거냐. XXX야(너-전달법)"라고 하는 것은 다른 접근법이다.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누가 말을 해도 씨가 안 먹힌다. "엄마가 자식 방에도 못 들어가니?"라는 막힌 말귀와 다짜고짜 욕설하는 비난 말씨는 불행한 만남이다.

전방의 소초 총기사건을 보면서 김동민 일병의 말귀는 상당히 막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말귀 막혔다고 총 휘두른 게 정당화될 순 없다. 참사는 아마 말이 안 통하는 데서 출발했을 것이다. 소통 난조의 시대다. 김 일병은 군부대에만 있는 걸까. 우리 안엔 없을까.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