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인문학 서적 출판에 평생 바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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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출판계를 지켜온 거목이 쓰러졌다.

60년간 한결같이 출판업에 종사한 도서출판 '일지사' 김성재 대표가 21일 오후 7시에 숙환으로 타계했다. 78세.

고인은 서울대 사범대 국문과에 재학 중 학생신분을 숨기고 '학원사'의 전신인 대양출판사 편집사원으로 들어갔다.

'간추린'이란 학습지 시리즈를 내 히트시키고 입사 이듬해인 1952년 우리나라 최초 중학생 잡지인 '학원'의 초대 편집장을 겸했다. 56년엔 직접 출판사를 차렸다. 일지사다. 빚을 내 시작했지만 대입 학습서를 잇따라 성공시키며 출판사를 일으켰다. 이후 일지사는 한국학.역사.미술사학 서적 등 모두가 외면하는 인문학 서적을 꾸준히 펴냈다. 학술잡지인 계간 '한국학보'도 30년째 발행하고 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하루 50여 쪽씩 직접 교정을 봐 '영원한 현역'이란 별명도 얻었다.

일지사 관계자는 "한국학보 적자가 워낙 커 오는 가을 120회로 종간할 예정이었는데 한 호 남겨놓고 돌아가셨다"며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타계 1주일 전까지 출근해 일할 정도로 정정하셨는데 갑자기 가셨다"며 안타까워했다.

또 "팔리지 않는 책이라 50여 년간 540종가량만 냈다"며 "돈을 벌려고 출판한 분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출판사 설립 십수 년만 돼도 1000여 종은 거뜬히 넘기는 게 보통이다.

학술서에 대한 대중적 기반이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30년동안 철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한국학보'를 발행한 것은 출판계에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평한다. 잡지를 낼수록 적자가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인은 출판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 정립도 안 돼 있던 시절인 85년 '출판의 이론과 실제'(일지사)를 썼다. 이 책은 대학 교재로 쓰이며 출판학의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다. 김대표는 저작권에 대해서도 일급 이론가로 꼽혔다. 이외 저서로는 '김성재출판론-출판현장의 이모저모'(일지사, 99년)와 역서'편집자란 무엇인가'(일지사, 93년) 등이 있다.

한국출판학회상(85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85년), 인촌기념회 제14회 인촌상(2000년)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과 세 아들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이며 발인은 24일 오전 10시다. 02-2072-2022.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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