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굴든」의 신간 『한국전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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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국전 초기에 미군과 한국군은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숱한 피를 흘렸다. 그 이유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오랫동안 전쟁을 준비해왔던 북괴는 전면 기습공격으로 단숨에 기선을 장악했고 이에 맞선 미군과 한국군은 전투훈련과 실전경험이 거의 없는 신병들이었으며 그나마 무기와 장비가 노후하고 부족했었다.
또 「맥아더」사령부가 북괴의 전력을 과소평가했으며, 북괴군의 전술·전약이 전쟁상식을 벗어난 엉뚱한 것이었다는 점도 빼놓을수없다. 이런 것을 깨닫기까지에는 비싼 댓가를 치러야했다.
미국동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이 북괴의 우세한 전력을 솔직이 시인한 것은 전쟁발발후 2주일이 더 지나고서였다. 「맥아더」장군은 50년7월13일 동경의 사령부에서 「콜린즈」육군참모총장·「반덴버그」공군참모총강·「워커」주한미군사령관과 전략회의를 가졌다.
「맥아더」장군은 이 자리에서 미국동군이 북괴의 남침계획과 한국군의 전투능력을 잘못 평가했다고 사과하고, 북괴군이 2차대전당시의 소련군수준에 이른 군대라고 밝혔다. 「맥아더」는 북괴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어떠한 병력』이라도 좋으니 미전투병력을 신속히 투입해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급박한 전황과 「맥아더」의『어떠한 병력』의 요구로 기초훈련도 제대로 안된 미군이 전선에 투입돼 미국은 초전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당시 오끼나와 기지에 주둔했던 미제29보병연대는 갓 징집된 신병으로 구성돼있었다.
병력수도 통상 연대병력의 절반도 못되는 6백명선이었다.
7윌20일 새로 도착한 신병 4백명이 제29연대 제3대대에 배속돼 개인장비와 무기를 지급받았다. 신병들은 전투훈련을 전혀 받지않아 M-1소총도 다룰줄 몰랐다. 그들은 일본에서 6주일간의 훈련을 받기로하고 떠났으나 그나마 시간에 쫓겨 받지 못했다. 7월24일 부산에 도착한 제3대대는 즉시 진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7월26일 다른 병력과 합류해 모두 7백57명이 하동전선에 투입됐는데 곧 북괴군의 매복작전에 걸려들었다.
미군들은 총과 장비를 버리고 탈주하려했으나 북괴군의 기관총 공격은 이들을 주저앉혔다. 북괴군은 마치 토끼사냥하듯 전혀 저항을 못하는 미군 대대병력을 유린했다. 두달뒤 미군이 하동을 탈환했을때 이지역에서 미군 시체 3백13구를 찾아냈고, 1백여명이 포로로 끌려갔음을 확인했다.
군대에서는『땀을 많이 흘린 병사가 피를 적게 흘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45년 제2차대전 종전이후 50년 한국전때까지 5년동안 미군은 땀을 적게 흘린 군대였다.
전승에 도취되고, 전후의 경기부흥에 힘입어 미국의 젊은이들은 엄격한 규율보다는 자유분방한 향락에 젖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군대에도 옮아 사병의 복무기간이 단축되고 교육수준과 육체적 강인성이 낮아졌다.
한마디로 훈련이 덜된 군대였다. 한국전이 터졌을때 미극동군 장병의 43%가 군인자질시험(AGQT)에서 제4급이나 제5급으로 기록되어 가장 수준이 낮았었다. 또 그때까지 대대급 규모이상 야전훈련이 실시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한국전선에 투입된 미군은 연대나 사단간의 합동작전훈련을 전혀 받지 못했다.
미군은 또 무기와 장비면에서도 전투를 수행할만한 준비태세가 돼있지 않았다. 극동군사령부의 태만으로 한국전선에 보급해야할 중화기·탄약·박격포·총가·수류탄 심지어는 소총의 꽂을대마저도 부족했다.
제35보병연대 제1대대의 경우 보병의 필수화기인 대전차 무반동총이 1문밖에 없었고, 기고나총의 기관총의 예비총신은 단1개도 없었다. 또 사병의 개인화기인 M-1과 M-2소총은 대부분 낡아빠져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군용차량 사정은 더욱 나빠서 차량의 대부분이 2차대전때 사용됐던 고물이었다. 시동이 걸리지않는 트럭, 라디에이터가 터져버린 엔진, 닳아빠진 타이어등등 전장에서는 쓸모없는차량이 많았다.
일본에 주둔했던 극동군의 기강은 해이했고 임전태세가 되어있지 않았다.
원자폭탄으로 일본을 굴복시켰기때문에 병사들은 『우리에게 원폭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는 태도였다. 많은 병사들이 일본여자와 살림을 차려 새로운 재미를 보고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당시 AP통신의 「킹」기자가 만났던 미제24사단의 한 병사는 『사세보의 내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나는 거기서 예쁜 일본여자와 2년이상 같이 살았다. 그녀는 밥도 지어주고 빨래도 해주고, 양말도 기워주고,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해 준다. 우리집에선 내가 「맥아더」다. 내가 명령만하면 그녀는 군소리없이 복종한다. 나는 그저 한달에 37달러를 주면 된다』 고 말했다.
미군의 훈련상태가 엉망이고 무기와 장비가 낡아빠진데 대해 「맥아더」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미국무성이 한국군의 전력강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미극동군의 훈련책임은 사령관이었던 「맥아더」장군에게 있었다.
전투훈련을 받지못한 미군은 북괴군의 생소한 게릴라 전법에걸려 고전했으며, 때로는 필요이상으로 잔인해지기도 했다. 미군들은 한국전선에서 한달이상 북괴군을 상대하고 나서야 그들의 갖가지 속임수를 터득하게 됐다. 북괴군은 미군과의 전투 지역안으로 부녀자·어린이·노인등 민간인 수백명을 몰아넣어 미군이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공격했다.
또 군복을 벗어버리고 온몸에 진흙칠을 해 미군진지로 잠입하거나, 10여명이 투항해와 미군의 공격이 멈춰지면 매복조가 기습공격을 했다. 50여명의 떼거리가 죽기로 작정하고 달려들어 미군의 화력이 집중되면 다른 부대가 측면을 기습하기도 했다. 북괴군은 또 민간복을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마다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동네로 숨어들었다.
북괴군이 민간인을 방패막이로 사용함으로써 미군은 상대적으로 잔인해졌다. 미군은 북괴군과 민간인을 구별할수 없었기때문에 북괴군이 숨어있을만한 마을을 몽땅 날려버리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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