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김정일 면담] 정부 "북핵 논의, 기대 이상의 성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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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측 대표단이 평양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있는 17일 오전, 이날 오후 평양에서 열리는 ‘평양라이온스 안과병원’ 준공식에 참석하는 방북단을 태우고 갈 고려 민항기가 인천공항에 머물고 있다. [영종도=연합]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나 북핵 문제에 대한 자신의 복안을 한꺼번에 털어놓았다. "용의가 있다" "미국과 좀 더 협의해 봐야겠다"는 등 전제조건을 달았지만 의미는 크다. 북한의 절대 권력자가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힌 형식 때문이다. 특히 "7월 중 6자회담에 복귀할 용의가 있다"는 입장을 직접 천명했다. 즉각 6자회담 재개에도 청신호가 켜진 것 아니냐는 희망 섞인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 "한.미 정상회담 긍정적 평가"=김 위원장은 정 장관에게 북핵 문제를 거론하면서 11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얘기부터 꺼냈다. "1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여러 가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의 북핵 해결 노력에 사의를 표한 것은 처음이자 극히 이례적이다.

김 위원장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 대해서도 성의를 보였다. "내가 부시 대통령 각하에 대해 나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각하'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파격적이다. 한.미 양국 정상에 대해 최고의 외교적 표현을 쓴 것이다. 물론 자신의 발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담겼을 수도 있다.

정부는 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6자회담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다" "핵 문제가 해결되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환영했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김 위원장과 정 장관이 북핵 현안을 놓고 충분한 대화를 주고받았다"며 "당초 우리 정부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과라는 게 정부 판단"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면담에 이어 열린 오찬장 분위기도 상당히 좋았다"며 "이는 회담 결과에 대해 양측 모두 만족스러워했다는 증거"라고 전했다.

노 대통령도 이날 저녁 정 장관의 귀국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김 위원장이 긴 시간 성의있게 대화한 것은 의미가 매우 크고 좋은 징조"라고 평가했다. 김 위원장의 언급으로 북한이 6자회담의 문턱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는 분석이다. 정 장관은 이날 김 위원장과의 면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바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핵 포기라는 전략적 결단을 내릴 경우 대대적인 경제.에너지 지원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했다고 정부 당국자는 전했다. 지난달 16일 남북 차관급 회담에서 제안한 '중요한 제안'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정 장관은 또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재확인한 내용들을 김 위원장에게 정확하고 상세하게 전달했다. 궁극적으로 북.미 간에 '보다 정상적인 관계(more normal relations)'가 가능하다는 게 핵심 메시지였다고 한다. "미국은 북한을 공격 또는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시 대통령의 언급도 전달했다.

◆ 일각에선 경계 목소리도=김 위원장이 보다 전략적인 행보를 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 않다. 남북 대화 활성화 분위기를 활용해 회담 복귀 날짜를 최대한 늦추려는 속셈이 아니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회담 복귀 시점을 한 번 더 늦춰 미국과 중국, 한국 등으로부터 좀 더 많은 양보를 얻어 내려는 속셈이라는 주장이다.

서울의 한 외교 소식통은 "김 위원장과 정 장관의 면담 효과가 최소한 두 달은 가지 않겠느냐"며 "그런 가운데 5MWe 원자로의 폐연료봉을 계속 재처리하는 등 협상용 실탄을 쟁여 두려는 의도가 담겨 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려면 구체적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설명이다.

정부 관계자는 "정부는 다음주 곧바로 이어지는 남북 장관급 회담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답변을 얻어 낼 방침"이라며 "북한은 하루속히 회담에 복귀하는 게 최선의 길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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