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김정일 면담] 이산상봉 제의에 김 위원장 즉석 지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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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17일 밤 서울 삼청동 남북대화사무국에서 방북 결과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17일 이뤄진 '김정일-정동영' 면담은 여러모로 파격적이었다. 단독 면담만 2시간30분에 오찬까지 모두 4시간50분. 예상을 뒤엎는 긴 시간 동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특유의 거침없는 화법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특사'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의 대화를 이끌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대동강 영빈관의 테이블엔 남북 간 현안들이 줄줄이 올라갔다.

◆ "김 위원장은 결단력 있는 지도자"=정 장관은 김 위원장에 대해 "시원시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는 인상을 받았다"며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정 장관은 "김 위원장은 즉석에서 처리할 문제에 대해선 바로바로 지시를 내렸다"고 소개했다.

김 위원장은 정 장관이 8.15에 맞춰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자고 제의하자 흔쾌히 받아들이며 배석한 임동옥 노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에게 곧바로 지시했다. 또 정 장관이 "정보화 시대에 맞게 화상 상봉을 하는 게 어떠냐"고 하자 "남북이 '경쟁적'으로 준비해 8.15 때 첫 화상 상봉이 가능하도록 추진하자"고 화답했다.

김 위원장은 "5분 동안 날씨 얘기 모내기 얘기나 하면서 덕담하다가 곧바로 말씨름하고 주먹질하는 소모적인 회담을 바꾸자"라거나 "육지에서는 길도 내고 하는 데 바다에서 총질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등 직설적 화술을 그대로 드러냈다. 김 위원장은 북핵 문제에 대해서도 "핵을 하나도 남길 이유가 없다. 와서 보라고 하라"며 거침없었다. 대화 중간 중요한 대목에서는 정 장관에게 "내 말을 공개해도 좋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 "노 대통령에게 감사"=김 위원장은 노 대통령에 대해서도 깍듯했다. "한.미 정상회담 등에서 여러 가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로 돌아온 정 장관에게서 회담 결과를 보고받은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긴 시간 성의있게 대화한 것은 매우 의미 있고 좋은 징조"라며 "이 계기를 잘 살려 성과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또 "사소한 말 실수 등으로 잘나가는 기조를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 "지인들 만나고 싶다"=김 위원장과 정 장관의 단독 면담 때 남측에선 서훈 통일부 실장, 북측에선 임동옥 제1부부장이 배석했다. 이어진 오찬엔 김 위원장을 만난 적이 있는 당국.민간 대표 7명이 함께 초청받았다. 김 위원장이 정 장관에게 "과거에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당국 대표단에선 임동원 전 국정원장,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 김보현 전 국정원 3차장, 최학래 한겨레신문 고문이 초청받았다. 민간 대표단에선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인 박용길 장로, 강만길 상지대 총장, 김민하 전 평통 수석 부의장이 포함됐다. 북측에서는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김양건 국방위원회 참사 등이 배석했다. 김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부를 묻고 "좋은 계절에 꼭 초청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정 장관은 전했다.

◆ 16일 밤 결정 면담 결정=북측은 남측이 극비리에 추진한 김 위원장 면담에 대해 16일 늦은 밤에 'OK' 사인을 줬다. 그러나 북측은 원칙적으로 수용의사를 밝히면서도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통보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 장관은 17일 아침 숙소인 백화원 초대소에서 조깅하다가 갑작스럽게 장소와 시간을 통보받았다.

정 장관은 오전 10시38분쯤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삼엄한 경계 속에 숙소를 출발했다. 면담 장소는 평양 중심부 주체 사상탑 인근에 위치한 대동강 영빈관이었다. 외국 손님을 환영하는 만찬 또는 회담 장소로 많이 이용되는 곳으로 김 위원장은 지난해 5월 방북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도 이곳에서 회담했다.

평양=공동취재단, 서승욱 기자 <sswook@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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