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팔레비 왕가의 부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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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본사가 테헤란의 바자에서 입수한 미국의 비밀문서 제 7책에는 『이란의 지도층과 세력분포』란 제목의 미 CIA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다. CIA의 「어니스트·오니」씨가 76년2월에 작성한 이 보고서는 1백50여 페이지에 걸쳐 「팔레비」국왕이 통치하던 이란의 권력구조에 대해 분석했으며 특히 이란 왕가의 사생활에 관한 83페이지의 비밀 보고서도 포함돼있다.
CIA 보고서는 이란의 내외정책과 그 배경을 분석하기 위한 기초자료로서 작성된 것이다. 「극비」로 분류된 CIA 보고서에는 이란왕실, 특히 「팔레비」국왕의 쌍둥이 누이 「아슈라프」공주의 분방한 사생활을 생생하게 적고있다.

<방탕·비행의 온상>
「팔레비」의 선왕 「레자·샤」는 11명의 자녀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10명의 자녀가 아직 살아있다. 이 자녀들과 그들의 가족, 「팔레비」의 어머니, 「파라」공주, 공주의 어머니 등이 이른바 「왕가」로 불린다. 「팔레비」왕가의 방대한 가족들은 「팔레비」 집권 때에 가장 큰 골치덩어리의 하나였다. 그들은 방탕과 비행·뇌물, 한마디로 부패의 온상이었다.
경우에 따라선 이런 이미지를 약간이나마 개선하고 이란 국민들의 고심에 오르내리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었지만 이란국민들은 마음 깊숙이「팔레비」일가는 방탕하고 썩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가족 중에서도 「팔레비」의 모후와 쌍둥이 누이 「아슈라프」공주 등 2명의 여인이 정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팔레비」의 어머니는 「팔레비」의 통치능력이 형편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후는 「팔레비」의 집권 초기에 막후에서 그를 쥐고 흔들어 영향력을 행사했다. 「팔레비」의 어머니는 그녀의 소생이 아닌 아들 「알리」(「팔레비」의 이복동생)를 왕좌에 앉히려는 음모를 여러 차례나 꾸민 것으로 알려졌다. 「팔레비」의 쌍둥이 여동생 「아슈라프」공주는 금전적인 부패와 젊은 남자를 쫓아다닌 면에선 거의 건설적인 명성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아슈라프」공주가 이란 여성들의 권리와 여성단체의 조직 및 그 역할을 하게 한 것은 순전히 그녀의 정력과 능력을 사회사업에 쏟게 함으로써 「팔레비」왕가의 대외적 이미지를 개선 해 보려는 「팔레비」자신의 배려 때문이었다. 「아슈라프」공주는 기회있는대로 그녀의 지위를 이용, 그녀 개인에 대한 정치적 추종자들을 규합하려고 시도, 「팔레비」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팔레비」는 아마도 공주의 비행을 사실 그대로 상세히는 알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팔레비」는 가끔 그녀의 비행을 규탄하는 소리가 나오면 몹시 화를 내곤 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쌍둥이로 태어난 두 사람의 관계가 선천적으로 친근감을 갖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편 셋 갈아치워>
어쨌든 「팔레비」가 주기적으로 「아슈라프」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 같은 부패추방 캠페인을 벌인 것은 「팔레비」의 인기를 상승케하는 작용을 했다.
다른 왕실가족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슈라프」공주의 경우에도 그녀의 어렸을 때의 행적이나 왕실 가족들과의 관계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게 없다. 「팔레비」의 아버지는 「아슈라프」공주를 가장 사랑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팔레비」의 둘째 부인「소라야」왕비는 그런 소문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아슈라프」공주는 배화교인(조로아스터)들이 경영하는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37년에 「알리·카밤」과 결혼, 아들「샤람」을 낳았다. 그러나 아버지인 「레자·샤」가 폐위된 지 얼마 안가서 「아슈라프」공주는 이혼을 하고 말았다.
3년 뒤인 49년 「아슈라프」공주는 이집트인 「아하마드·샤피크」와 재혼, 다시 아들 「샤안」과 딸 「아자데」를 낳았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도 10년이 안가 이혼으로 끝나고 60년엔 「메흐디·부셰리」박사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아슈라프」공주의 남편들은 항상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 「샤피크」는 파르스 항공사의 사장이 되어 밀수로 큰돈을 벌었다.
세 번째 남편 「부셰리」에겐 순회대사 및 예술위원회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주어졌는데 그는 소련 항공사 에어프로트의 이란 취항을 주선하면서 역시 큰돈을 벌었다. 「아슈라프」공주는 또 수많은 젊은 남자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으로 소문이 파다했다. 그녀가 돌보아준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좋은 직위를 차지했는데 그 예로 「파비즈·라지」는 「호베이다」 수상의 보좌관으로 임명됐었다.

<갈등 겪는 팔레비>
「아슈타프」공주는 또 욕심이 많고 잔인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한 성격은 「팔레비」가 말년에 권한이 상당히 약화됐던 기간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녀는 남편과 젊은 남자친구들에게 정부의 계약을 따주는 일은 물론 그 과정에서 커미션을 받아 챙기는 일을 한번도 주저한 적이 없었다. 「아슈라프」 공주와 왕족들의 이같은 경제적 이권추구 행동에 대해 「팔레비」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에 대해선 상반된 견해가 있다. 「팔레비」는 아마도 가족들의 충성심과 깨끗한 정부를 추구하려는 자신의 이상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팔레비」는 「아슈라프」공주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를 놓고 골치를 앓았음이 분명하다.
50년대 초에 나온 한 보고서에 의하면 「팔레비」는 「아슈라프」가 「팔레비」자신의 이름을 팔지 않는 한 그녀가 각종 사업을 하는 것은 괜찮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돼있다.
이란 중앙은행의 총재는 「아슈라프」공주가 지나친 방법으로 업무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팔레비」에게 보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팔레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이 은행장은 『다른 사람이 그런 일에 개입했다면 최소한 10년 징역은 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약밀수도 손대>
「아슈라프」공주에게 가장 치명적인 소문은 그녀가 마약 밀수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증거는 많지 않지만 반대파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아슈라프」공주의 마약 밀수 문제를 들고나 왔고 이는 결국 「팔레비」가족 전체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했다.
「아슈라프」공주의 아들 「샤람」도 어떤 면에선 어머니의 명성을 이어받고 있었다. 모전자전 이라고나 할까? 테헤란에선 그가 돈만 아는 모리배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는 수송회사·나이트 클럽·건설회사·광고회사 등 20개의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회사들 중 일부는 어머니인 「아슈라프」공주의 합법을 가장한 재산이었다. 「샤람」의 행동중 가장 무책임하고 악명 높았던 일은 그가 이란의 국보급 문화재와 골동품을 팔아 넘긴 행위였다.
특히 그는 고고학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말리크」의 선사시대 유물을 팔아 넘겨 이란 국민들의 대단한 원성을 샀던 것이다. 「아슈라프」공주는 현재 뉴욕 맨해턴의 고급 아파트에서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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