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매일 물 네 주전자씩 마시며 읽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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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S전자)" "난 소중하니까요(L헤어용품)" "아름다운 사람들, OOOO항공(A항공사)"

20여 년의 세월. 광고 속 모델들은 숱하게 명멸했지만, 카피를 읽는 낭랑한 음성의 주인공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광고계의 간판 성우 권희덕(49)씨. 1980년대 톱스타 최진실씨의 애교 넘치는 목소리를 연기한 실제 인물로 유명세를 탄 그는 이후 5000여 편의 TV.라디오 광고를 녹음했다.

그런 권씨가 최근 성경 66권을 완독(完讀)해 CD 100장에 담은 '마음으로 듣는 권희덕의 소리성경'을 냈다. 광고와 성경, 뜬금없이 그 커다란 간극을 뛰어넘은 동기가 궁금했다.

"우리 큰 아들(런던정경대 석사과정 재학 중)은 평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하나님'이라는 아이에요. 걔가 지난해 여름방학 때 서울에 와서 저한테 지극 정성을 다하는데 문득 '아들이 기뻐할 선물을 줘야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함께 교회에 나가던 날, 자신도 모르게 기도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아직 목소리가 좋을 때 성경을 완독해 녹음하게 해주세요"라고. 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병환 중에 있던 친정 아버지가 별세한 뒤 그 충격 때문인지 갑자기 왼쪽 눈이 안보였다. 병원에 가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아는 이의 소개로 침 놓는 목사님을 소개받았는데 그가 "병을 고치도록 힘써줄테니 성경을 꼭 완독하도록 하라"고 당부하더라고 했다.

그 말에 힘입어 권씨는 올해 3월 녹음을 시작했다. 꼬박 한 달반 동안 매일 6~10시간 성경을 읽었다. "광고 연기는 15초, 외화 더빙도 서너 시간 짜리가 고작이잖아요. 그러나 이번 성경 녹음 작업은 물 네 주전자를 계속 따라마시며 온종일 쉬지 않고 매달려야 했어요."

다행히 몸이 버텨주었다. 그간 성우로선 치명적인 구안괘사(입이 돌아가는 병)를 네 차례나 겪어 늘 건강 걱정에 시달리는 그였는데, 녹음 기간에는 그 흔한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 눈 상태도 오히려 호전됐다.

CD를 들어보니 광고에서의 목소리와는 딴판이다. 차분한 저음이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어떤 교수님이 저더러 천의 목소리를 가졌대요. 스무 살 때 동아방송 7기 성우로 데뷔하며 처음 맡은 역이 노파였어요. 얼마 있다 라디오 첫 주연을 따냈는데 40대 어머니 역이었죠. 하지만 좀 더 나이 들어선 최진실씨 외에 메그 라이언.잉그리드 버그먼.임청하 같은 미인들 역을 단골로 맡았어요."

그 중에서 어떤 역이 가장 맘에 드느냐고 묻자 권씨는 "허리 사이즈 22인치인 여자들은 다 내 목소리와 어울린다"며 웃었다.

글=신예리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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