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양 피살사건″백28일만의 역전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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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용의자의 영장 없는 장기연행, 불법감금, 물증 없는 심증만의 수사로 물의를 일으켰던 박상은양 피살사건이 사건발생 1백28일만에 검찰이 정재파군(21)을 진법으로 구속함으로써 일단 마무리됐다.
『이 사건에 장군외의 범인은 없다』며 경찰이 명예를 걸고 밀었던 용의자 장경수군(22)이 지난해 11월28일 검찰에 송치된 후 검찰에 의해 무혐의로 밝혀지고 같은 해외연수 동기생이었던 정재파군이 살인혐의로 긴급구속 되기까지 57일만의 역전드라마를 수사 팀들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스무 개의 퀘스천 마크>
살인피의자에 대한 불구속입건이란 유례 없는 결정을 내렸던 서울 동부지청은 사건송치와 동시에 처음 이 사건을 맡았던 김기준 검사대신에 강원일 부장, 조병길·이종왕 검사 등 3명의 지휘검사와 12명의 수사요원으로 자체수사 팀을 만들었다.
우선은 경찰이 각성한 장군에 대한 수사기록을 세밀히 검토, 혐의유무를 결정키로 했다. 그 결과 자백이나 목격자진술·범행동기 등에 많은 허구성이 발견되었고 치흔 감정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결점이 지적됐다.
수사 팀은 일단 장군을 제쳐놓고 다른 사람의 범행가능성을 찾아보기로 했다.
원점으로부터의 출발이었다.
20개의 체크 포인트가 선정됐다. ▲박양은 사건날밤T셔츠·청바지를 입고 맨발에 샌들을 신었다. 그런 가벼운 옷차림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시간에 박양 집 앞에서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불러낼 때 전화목소리는 여자였는데 그 여자는 범인과 어떤 관계이어야 하는가▲사체발견 장소까지의 이동방법은 무엇이었을까▲수많은 여관 중에 하필이면 삼성동에 있는 여관이었을까▲왜 죽었을까하는 것 등이 주요골자였다.
그 결과 범인은 면식범이고 박양이 직업여성이나 사업가가 아닌 대학생이란 신분으로 살해동기는 치정일 가능성이 높다는 기초적인 결론에 도달, 이 2개의 체크 포인트에 저촉되는 관련자를 뽑았다.

<20명중에 정군이>
모두1백20여명이 수사선상에 떠올랐다. 이 가운데 지난 연말까지 1백명을 털어 버리고 20여명으로 압축했다. 다음은 유인에서 살해장소까지의 이동방법에 포인트를 맞추었다.
박양 아파트에서 사체발견장소까지는 5km. 도보로는 너무 먼 거리였고 버스는 직선코스가 없었다. 택시 또는 자가용이 이동수단이었다.
지리 감에서 볼 때 유인장소 (박양 아파트 앞) 에서 정군의 숙모 집까지는 10여m, 사체유기장소에서 정군 집까지는 8백여m, 그리고 정군은 자가용을 몰고 있었다. 20개의 체크 포인트에 정군은 70%정도의 밀접성이 있었다.
송치기록 중 정군 부분을 빼내 글자 하나하나를 점검했다. 박양 사체발견 다음날인 9월22일 정군은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정군은 이때 9월19일 아침 숙모 집에 백과사전을 빌려 간 일은 있어도 18일 밤에는 박양이 사는 잠실장미아파트 근처엔 간 일이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또 그 날은 밤9시에 집에 들어가 잤다고 했다.
담당 경찰관은 숙모 집까지 찾아가 사실여부를 확인한 결과 숙모대답도 날자는 정확치 않으나 아침에 왔다간 일이 있다고 기록돼있었다. 정군 부모도 정군이 사건날밤 9시부터 3집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성립시켰다.
경찰은 정군에 대한 2차 진술까지 받았으나 너무 쉽게 알리바이를 믿은 흔적이 보였다.
이외엔 더 이상 정군에 대한 조사는 없었다.

<결정적 증거가>
정군에 대한50여 장에 이르는 조서 중엔 수사 팀을 긴장시키는 대목이 있었다. 경찰은 9월26일 정군 차 트렁크에서 낡은 시트커버를 압수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시트가 낡아 며칠 전에 새것으로 갈았다』는 정군의 진술만 있을 뿐 시트커버를 감정했다는 부분이 없었다.
경찰에 확인결과 그 시트커버는 아직 경찰이 보관 중이었다. 수사 팀은 이를 인수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했다. 해가 바뀌어82년1월 중순이었다.
며칠 뒤 1차 감정결과가 왔다.『육안 혈흔발견 불능. 화학반응결과 좁쌀 알 만한 인혈(인혈) 10점 추출』-.
수사 팀은 2차 정밀감정을 의뢰했다.
그리고 박양 사체감정기록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긁힌 자국이나 외상은 없었다. 박양 사체발견 때 두 팔은 양쪽으로 날개처럼 펼쳐진 채 경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실내에서 늘어진 사람을 겨드랑이에 손을 껴 끌어냈을 때의 모습이었다.
『지리 감·자동차·면식범·시트커버…. 그렇다면 정군이?』하는 더욱 짙은 의심이 생겼을 때 감정결과가 통보됐다. 혈흔은 죽은 박양과 같은 O형이었다.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
1월4일 정군에게 검찰에 출두해줄 것을 요구했다. 처음 그를 보는 순간 수사 팀은 외모에 실망했다. 키1m66cm, 체중48kg의 허약한 체구였다. 저런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큰 박양을 죽였을까하는 것이었다.
자술서를 쓰게 했다. 경찰에서의 자술과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군은 9월19일 아침에 숙모 집에 갔었다는 사실을 빼놓고 쓰고 있었다.
1월5일 2차 출두 때 또 자술서를 썼지만 역시 9월19일 부분을 빼놓고 있었다. 9월18일 밤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이 부분을 썼어야할텐데 두 번이나 빼놓은 것이다.
수사 팀은 정군이 무의식적으로 9월18일을 기억하고 있고 사건초기에 주입했던「9월19일」을 상당기간이 흐름에 따라 잊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1월6일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를 했다.
정군은 박양 집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8개의 전화번호 중 박양 집 전화번호가 나왔을 때 이상반응을 보였다.
정군은 또 박양이 입었던 옷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고 했다. 8벌의 옷을 차례로 보이던 중 네 번째 박양 옷을 보는 순간 가슴이 떨린다는 말을 했다.

<범인이다!>
정군을 집로 돌려보낸 수사 팀은 19일까지 그의 주변수사와 함께 정군의 알리바이를 깨는 방법에 들어갔다.
이사이 정군은 거의 매일밤 술을 마셨다. 친구들은 그가 엉뚱한 면이 있다고 했다. 압수한 일기책에는『연수초기에 자기 방으로 놀러오라고까지 했던 상은이가 요즘 변심했다』는 독백이 있었다.
여러 가지 증거는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알리바이, 그것들은 모두가 가족관계의 철옹성 같은 알리바이였다.
이를 부수는데는 본인의 진실 된 자백이 필요했다. 19일을 D데이로 잡았다.
강 부장검사는 수사요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이제는 부닥쳐 보는 거요. 검찰은 단호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끈기가 있다는 것을 상대편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있는 각종 증거는 절대 제시하지 마시오.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끈기와 두뇌로 싸워야합니다.』그는 호남전기 억대 탈세사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해결한 수사 베테랑.
19일 정군의 신병을 확보했다. 48시간으로 시한을 잡았다. 끝내 그는 입을 열지 않았고 첫 시도는 실패였다.

<차안에서 죽였습니다>
수사 팀은 다시 회동, 마지막 시도로 72시간 조사하기로 했다.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경우 범인인줄 알면서 사건을 놓치자고 비장한 각오를 했다.
담당검사에게는 정장을 하고 피곤해도 자세를 흩트리지 말며 담배를 피우되 정군과 같이 피우도록 지시했다.
48시간이 지난 21일 상오, 차차 동요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 검사님을 불러 주십시오.』수사관중 자신에게 제일 친절했던 사람을 찾는 것은 범인의 자백심리의 교과서였다. 그는 이 교과서대로 이어서 담배를 요구했고 어머니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조 검사가 쾌히 응낙하자 그는 녹화테이프 이외에 다른 증거를 하나 더 보여준다면 자백하겠다고 했다.
조 검사가『그러면 하나 더 보여주겠다』며 선뜻 이에 응하려하자 정군은 조 검사가 보여주려던 피묻은 시트커버를 보기도 전에 체념한 듯 『차안에서 죽였습니다』고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조금 후 조 검사가 문제의 시트커버에 묻었던 혈흔에 대한 감정서를 보여주자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섯 번을 읽었다.
모든 요구가 들어지자 그는『잘못했습니다. 다 털어놓지요』하며 전화를 건 사람이 숙모였다는 것, 사건 당일 밤11시 넘어 들어갈 때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는 등 알리바이 벽이 깨지기 시작했다.
이때가 22일 낮1시, 환한 대낮에 받아낸 자백이었다. 통상 자백시간인 밤중이 아닌 대낮의 자백이었다.

<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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