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기획] 바이퍼트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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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경쟁시대의 선택

전문가?
요즘 세상에 어느 한구석이라도
전문가 아닌 사람 있나.
적어도 두세 가지 이상의 전문분야는 있어야 명함을 내밀지. 경쟁 사회가 고도화하면서
갈수록 고단해지는 게 세상 살기다.
아직도 '취업 성공, 공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초년병이 있다면
그는 이미 낙오의 대열에 발을 들여놓은 것.
학원을 몇 군데씩 다니면서도
만화 가게에서 노는 고 3생만큼이나
불안한 게 직장인들이다.
전문직업인이라고 그런 불안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부도나는 병원이나 겨우 임대료나 내는
법률사무소가 늘고 있다는 것은 이제
뉴스거리도 못된다. 두루뭉술 전문가에서
벗어나 나만의 특화된 전문분야를 찾기 위한
노력들이 오늘도 우리 곁에서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이른바 바이퍼트(Bipert)족이다.
처음 듣는 얘기라면 당신도 긴장해야 한다.

글=이훈범 기자<cielbleu@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한 우물만 파기엔 불안…전문분야 넓힌다

대장항문과 전문의 정해성(42) 제일항외과 원장. 그도 바이퍼트족이다. 그는 2003년 열린사이버대학(www.ocu.ac.kr) 경영학부에 입학해 뒤늦은 향학열을 불태우고 있다. 버젓한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선생님이 뭐가 아쉬워 다시 경영학을 공부한단 말인가. 아픈 사연이 있었다. 1987년 의대를 졸업하고 개인 병원을 운영하던 정 원장은 길병원 측으로부터 동인천 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의욕적으로 일했지만 병원은 경영난에 시달리다 지난해 끝내 문을 닫는 사태에 이르렀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경영 책임자로서 자책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지난해 인천 부평에 병원을 개업한 그는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좀 더 빨리 시작했더라면…"하는 안타까움보다는 "세상의 또 다른 출구를 발견했다"는 자신감에 차 있다. 정 원장은 "앞으로 의료시장에 영리법인이 등장해 엄청난 자본이 밀려 들어올 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준비해 둬야 한다"고 말했다. "몇 년 뒤 외과 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프랜차이즈 네트워크 병원을 운영" 하는 게 그의 포부다.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김길재(36)씨도 국내 1위의 하나안진회계법인에 근무하는 잘나가는 공인회계사다. 하지만 뭔가 자신 만의 특화 분야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지난해 야간 대학원에 등록했다. 아직은 현업과 전혀 연관 관계가 없어 학비 보조 등 회사 지원은커녕 눈치를 살펴야 하는 형편. 그러나 앞으로 부동산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부동산 관련 절세 방안의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에서 형설지공을 다하고 있다. 게다가 학우들 중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변호사나 은행 지점장 등 전문 직업인들이 여럿 있어 인맥 형성이라는 부가가치도 올리고 있다.

꼭 대학에 다시 들어가지는 않아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스터디그룹을 형성해 전문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움직임도 많다. '화장품을 연구하는 피부과 의사의 모임(화연의)'도 그중 하나다. 최근 화장품을 피부질환을 치료하는 보조제로 널리 사용하고 있는 상황 에서 피부과 의사들 또한 화장품 전문가가 돼야 한다는 각성에서 생겨난 단체다.

화연의는 서울.대구.광주.부산 등 전국 각지에서 의사들과 화장품 전문가, 교수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개최함으로써 국내에서는 크게 부족한 화장품학과 피부과학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바이퍼트족
'둘'을 의미하는 접두사 'bi'와 전문가를 뜻하는 'expert'가 합성된 것. 문자 그대로 전문 분야가 두개 이상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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