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웃다 80年] 23. 한국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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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장미 악극단 시절의 필자. 내 바보 연기는 늘 객석의 웃음을 자아냈다.

1950년 5월. 나는 장미 악극단 소속으로 서울 종로의 단성사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바보 연기를 면밀히 파고 들었다.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는 시점과 이유도 나름대로 분석했다. 그리고 더욱 철저한 바보가 되려고 노력했다. 눈두덩을 삼각형으로 새까맣게 칠하고, 광대뼈 옆에 동전만한 점을 그렸다. 어기적 어기적하는 특유의 바보 걸음걸이도 개발했다. 내가 무대에 나가면 객석에선 늘 폭소가 터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육군본부에서 한 군인이 극장으로 찾아왔다. 소위 계급장에 '변형두'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배우를 모집하러 왔습니다. 희망자는 ×월 ×일까지 육군본부로 나와 주십시오." 이유는 간단했다. 배우들을 모아 공비 출몰 지역에서 주민들을 상대로 계몽 공연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좌.우익의 대립이 극심했다. 지리산 부근에선 시도 때도 없이 공비가 출몰하고 있었다. 또 일부 주민들은 공비들과 내통한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공연을 보여주자는 취지였다.

사실 배우들에겐 취지보다 조건이 먼저였다. 군에서 내건 조건은 눈길을 끌만 했다. 군속으로 문관 대우를 받으면서 숙식도 해결할 수 있었다. 또 소위에 해당하는 월급까지 준다고 했다. 나는 고민했다. '장미 악극단이 아무리 일류라지만 장담하긴 어렵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게 어수선한데 언제 해산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육군본부가 제시한 조건은 장미 악극단에서 내가 받던 대우보다 훨씬 나았다.

결국 육군본부를 찾아갔다. 지원자는 예상보다 많았다. 100명을 훌쩍 넘어설 정도였다. 심사를 거친 뒤 육군본부는 지원자를 반씩 나눴다. 한쪽은 '양양소대', 다른 쪽은 '화랑소대'라고 이름붙였다. 나는 양양소대에 들어갔다. 나중에 보니 배우는 15명 정도였다. 나머진 악사와 연출가.각본가, 그리고 무대 뒷일을 보는 사람들이었다.

지원자들은 공연을 준비했다. 머리를 맞대고 대본을 짰다. 그리고 연습에 돌입했다. 하나같이 공비들의 잔혹성과 자유의 가치를 선전하는 내용이었다. 양양소대는 지리산 주변 지역을 돌며 공연을 올렸다. 동네에서 가장 널찍한 장소를 골라 주민들을 모았다. 공연은 주로 낮에 열렸다. 밤에는 언제 공비가 산에서 내려와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나는 군예대 본부가 있는 서울 용산으로 갔다. 간만에 휴가를 받아 군예대에서 드럼을 치던 친구의 한남동 집에서 묵고 있었다. 6월 25일 아침이었다. '애애~앵'하고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곤히 자던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휴가 나온 군인들은 즉시 부대로 복귀하시오." 거리를 누비는 군용 차량의 스피커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멀리 북쪽에서 '쿠~웅, 쿠~웅'하는 포성이 울렸다. 시내에서도 생생하게 들렸다. 허둥지둥 부대에 갔더니 장교들이 말했다. "북에서 밀고 내려왔어. 전쟁이 터졌다."

배삼룡 코미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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