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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저울 위에 빈 몸으로 서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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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새해의 달력을 건다.
손때 하나 없이 순백으로 기다리는 처녀림의 3백65일.
못 다한 어제의 미련으로 이토록 기다려지는가.
지난해에도, 지지난 해에도 그토록 가슴 메우던 설렘. 번번이 시간 속에서 망각에 빠지지만 정초를 전후해서 솟아오르는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아침이슬처럼 영원할 듯 영롱하다.
한 살 더 먹으니 어른 같은데.
한 살 더 먹으니 더 예뻐지는구나.
나이 많아지고 싶어 떡국 서너 그릇을 먹겠다던 그 시절, 머리 쓰다듬어 주시던 어른들은 이미 곁에서 떠나시고 이제는 내가 올망졸망 모인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희에게는 기쁨이 되고, 내게는 시간의 저울대에 빈 몸으로서는 자생의 시간이다.
시간은 여리 디 여린 화초들처럼 잠시도 애정을 기울이지 않으면 탈이 난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어느새 떠나 사라진다. 내가 한 만큼만 내게 주는 시간의 결산서, 그 결과로 나를 위협하고 복수한다. 하나 시간은 기다리고 매달리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주었다.
지난 1년은 길었지만 결국 나의 시간은 짧았다. 지나고 나서야 발자국은 보이고, 그래서 부끄럽고 죄송해 어서 내일이 기다려진다.
새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지. 설령 내일을 기다리다가 죽고 마는 하루살이라고 하더라도 기다림은 지친 영혼 위에 얼마나 큰 축복의 비인지.
새해에는 잡다한 욕망에서 떠나고 싶다
맑고 청정한 물처럼 흐르기를 멈추지 않고, 주어진 그릇을 평형으로 채우고, 그 속 빈틈없이 다 비추는, 신선한 숲 속을 흐르는 물이고 싶다. 목마른 나무들을 목 추겨 주고 그 힘으로 그 둘레에 가득히 신선한 입김을 채우는, 주는 물이고 싶다. 정녕 원하기는 더러움을 씻기고 타오르는 불길을 다스리는 물이고 싶다.
눈발 흩날리는 얼음뿐인 이 겨울에 물을 생각함은 봄을 기다리는 염원 때문이리라.
아아, 그러나 용솟음치는 물살의 포효를 어 쩌랴. 구천 땅 끝에서부터 치미는 갖가지 욕망의 물줄기.
욕망은 아름다운 꿈의 날개이기도 하지만 아픔과 고통의 산실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도 욕망의 산은 높았다. 불혹의 40에서 멀어 선가. 한 고개를 넘으면 또 한 고개가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손때로 얼룩지고 갖가지 메모에 이리저리 상처 가득한 지난해의 달력을 쓰다듬는다. 나의 인생도 이렇거니, 그러나 지금 새해의 달력을 걸고 있지 않은가.
스러지던 불꽃이 다시 타오르고 불꽃 심지는 오랜만에 기름 속에 흥건히 젖어 있다.
나는 어린 날 잔불을 켜고 소원을 말하듯 꼭 한가지 소원만을 말하리라.
김유선<주부·서울 도봉구 월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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