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여름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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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경림(1935~ ), '여름날'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 냄새를 풍기고 있다


소나기가 내리고 난 뒤 물이 불고 달리는 자동차는 그 앞에서 머뭇거린다. 기계가 자연 앞에서 겸손해 하는 것이다. 또 젊은 아낙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허연 허벅지를' 드러내 놓고 '철벙대며 물을 건너고' 있다. 이때의 아낙은 원시적 생명력으로 충일한 건강성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도회지 여성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눈부신 생의 관능은 어지럼증을 불러온다. 이것이야말로 시의 웰빙이 아닌가.

이재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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