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쟁점 첨예한 대립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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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한국과 일본의 역사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2002년 발족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이하 역사공동위)가 3년간의 비공개 활동을 마치고 31일 최종 보고서를 내놨다. 1일 외교통상부와 교육인적자원부 홈페이지에 공개한 이 보고서는 A4 용지 2400쪽 분량에 양국 간 역사 분쟁의 주요 쟁점들을 담고 있다. '역사학 국가대표'간의 긴 줄다리기 결과를 담은 첫 보고서는 양국 역사 인식의 차이를 분명하게 '확인'하는 데 그쳤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역사공동위에 참여한 양국 학자들의 역사 인식 차이는 극명했다. 고대사부터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쟁점마다 의견이 갈렸다. 한국 측 위원회는 교육인적자원부에 소속됐고, 일본 측 위원회는 일본 외무성 산하 일.한 문화교류기금이 주관했으므로 양측 위원회의 입장은 양국 정부의 공식 견해를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뚜렷한 차이를 보인 것은 '역사 분쟁의 지뢰밭'인 근.현대 시기. 근.현대사와 관련해 일본 측 학자들은 문제의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와 비슷한 시각을 드러냈다. '을사병합조약''식민지배와 근대성'문제 등에 대해 일본 측은 "을사조약은 국제법적으로 합법이며 열강들도 인정했다. 일본의 식민정책으로 한국에 근대적 측면이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제 동원'과 '민족운동'에 대해선 "조선인들의 저항이 별로 없었다. 항일 민족운동은 국가의식이 희박하고 리더십이 결여됐으므로 스스로 독립하기 어려웠다"고 주장했다. 일본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다루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을사조약은 불법이다. 식민지 시대의 수탈적 구조를 명확히 해야 한다. 식민지 시대 한국인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하며 일본 측과 평행선을 달렸다.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의 배상.보상 문제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다. 한국 측이 "청구권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위안부 문제의 강제 동원 사실을 논의하지 않았으므로 일본 정부는 여전히 배상.보상 의무가 있다"는 논리를 편 반면, 일본 측은 "한.일 협정을 통해 식민지 지배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배상.보상 의무가 소멸했다"며 분명히 선을 그었다.

임진왜란을 다룬 중세 분과에선 주제 선정에서부터 티격태격했다. 한국 측은 "전쟁을 미화해선 안 된다는 관점을 유지하자"는 입장을 보인 반면, 일본 측은 "임진왜란 개전부터 3개월간의 군량 문제를 다루자"고 제안했다. 최종 보고서를 검토한 국내의 한 역사학자는 "임진왜란에 관한 일본 측 제안은 전쟁의 부당성과 민중의 피해상 등 핵심을 피해가는 황당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또 한.일 관계사에서 문화 교류의 상징으로 꼽히는 조선통신사에 대해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가 조선 사절을 조공으로 간주했다"는 일방적 주장을 반복했다. 왜구 문제에 대해선 한국이 "왜구는 무역행위의 위반자"라고만 표현한 반면, 일본은 "중세 왜구는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중국인도 포함된 동아시아 공통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고대사의 쟁점은 임나일본부설에 집중됐다. 한국은 "가공의 역사"라며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은 "왜군이 한반도에서 군사활동을 한 흔적이 있으며 4세기 당시 강성했던 왜 왕권도 한반도 남부에 대한 지배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주장해 논쟁의 불씨를 남겼다.

최종 보고서는 19개 대주제별로 각각 한.일 학자의 논문 한 편씩 등 모두 40여개의 논문으로 구성됐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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