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4)패션 50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생맥주·통기타와 함께 70년대 청년문화·논쟁의 불씨가 되었던 청바지가 서울거리에 등장한 것은 73년 가을께부터였다.
그러나 청바지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6·25직후로 미군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흘러들어왔었다. 당시는 해군작업복 바지라거나 카우보이 바지라고 흔히 불렸는데 「청바지는 기성체제에 대한 반발과 분노를 상징한다」고한 「마셜·맥루헌」의 말처럼 청바지를 입은 청소년은 불량학생이나 반항아로 취급받기 일쑤여서 그랬는지 그 당시는 별로 크게 유행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영파워와 히피풍조의 확산에따라 하나의 젊음의 상징처럼 세계적으로 청바지붐이 일자 대학생들을 위시한 우리나라 청소년들도 즐겨 청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애초 청바지의 유래가 19세기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천막이나 포장마차 천으로 만든 광산촌 노동자들의 작업복이었듯 투박하고 거친청바지에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처럼 열광하는 원인을 전문가들은 우아하고 섬세한 기존패션과 인공미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감으로 풀이했다.
청바지의 소재인 데님은 1백%면이므로 화학섬유시대의 천연섬유에 대한 향수를 만족시켜 줄 뿐더러 빨때마다 탈색이 되는 것도 고도의 기계문명으로 잃어버린 낡은 것에 대한 애착을 충족시켜주기때문이라는 해석이었다.
자꾸 빨아서 닳고 바랜 청바지가 주는 것에 매료된 젊은이들중엔 아예 새로 산 바지를 거친 솔로 문길러 빨고 아랫단의 올을 풀어서 처음부터 낡은 멋을 내는 이들도 꽤 많았다.
FIT에서 디자이너 수업을 끝내고 73년 귀국한 신현장은 이같은 세계적인 청바지 붐에 착안해서 74년 봄에 가진 첫번 패션쇼의 소재를 진만을 씀으로써 서울 부산 대구등 순회발표회를 통해 청바지 붐을 부채질하기도 했다.
그뿐아니라 후에 설립된 와라실업에서 계속 진을 전문으로 다뤄진 전문 메이커로 키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렇둣 73년 가을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서울의 청바지 유행은 74년 봄과 여름을 거치는동안 빠르고 세차게 터져나가 청소년들의 제복처럼 여겨질 정도로 급격한 붐을 이루었다.
뿐만아니라 가을이 되면서 날씨가 쌀쌀해지자 차게 느껴지는 진의 감촉을 보완하듯 코듀로이(속칭 코르덴)가 새로운 영패션의 인기 소재로 등장해서 청바지와 함께 코듀로이의 사파리 재킷이나 점퍼 혹은 후드 달린 반코트가 대학생들의 통학복으로 많이 애용됐다.
그러나 이렇듯 경제력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답게 실용적이고 소박한 멋을 추구하는 건전한 경향을 지닌 영패션이 75년 여름에는 미군복모방으로 한때 말썽을 빚기도했다.
US ARMY의 표찰까지 붙인 국방색 미군전투복 웃도리가 10대후반과 20대초반의 재수생이나 일부 남녀대학생 사이에서 갑작스레 유행됨으로써 생각있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만든 것이다.
미국에서 월남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월남전에서 남편이나 아들을 잃은 가족들이 항의하는 의미로 입은것을 잘못 흉내낸 이 어설픈 유행은 빗발치는 사회의 비난으로 곧 수그러들고 말았다.
아뭏든 이렇듯 젊음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시작된 청바지 유행은 해를 거듭하면서 차츰 연령층이 넓어지기 시작하고 푸른색뿐 아니라 원색·핑크·회색·베이지등 다채로운 색깔의 컬러진도 출현했다.
그리고 소재도 재래의 뻣뻣하고 두터운 것부터 부드럽고 얄팍한 것까지 다양해졌으며 스타일도 슬랙스뿐아니라 셔츠나 스커트를 비롯해서 포멀한 수트, 그리고 모자나 벨트, 백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개발되어 진패션이 피크를 이룬 77년께에는 명실공히 토틀 루크를 이뤘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