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球와 함께한 60年] (20) 김성길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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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30승을 올린 장명부(당시 삼미), 85년 '밤의 신사'라는 화려한 별명과 함께 국내에 데뷔한 김일융(당시 삼성)으로 대변되는 재일동포 선수들은 86년까지 각팀의 주축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장명부를 시작으로 국내를 거쳐갔던 재일동포 선수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다면 '부시맨'이란 별명으로 통했던 잠수함 투수 김성길(전 삼성)이다.

김성길은 국내 진출 과정부터 영호남 라이벌인 삼성과 해태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86년까지 김성길이 활약한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전신)는 해태 타이거스와 자매구단이었다. 해태는 한큐의 훈련장인 일본 시코쿠에서 수차례 전지훈련을 했고, 양팀은 코치교류를 통해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86년 겨울, 해태는 "한큐에서 김성길이 자유계약선수로 풀린다는데 우리가 접촉해도 좋겠느냐"며 질의를 해왔다. 나는 "물론이다.한.일 프로야구선수 협정에 준해서 신분조회 후 스카우트해도 좋다"라고 답변을 했다. 그러나 2개월 정도가 흐른 87년 1월, "삼성에서 김성길과 접촉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1월 8일, 해태 박건배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아무래도 김성길은 삼성에 양보해야겠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1월16일 해태 강남형 사장으로부터 전혀 다른 내용의 전화가 왔다."삼성 이종기 사장을 만나 설득했다. 삼성이 김성길을 안 받기로 했다. 그러니 박건배 회장의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해달라"고 했다.

해태는 김성길 스카우트를 추진했고,일본 프로야구 사무국장으로부터 1월 19일 "김성길이 임의탈퇴선수로 공시됐으며 한국의 해태는 한큐와 교섭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그로부터 2개월 뒤, 해태는 이상국 당시 운영과장(현 KBO 사무총장)과 일본 출신의 박정일 코치를 일본에 파견해 김성길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성길은 "삼성말고 다른 팀엔 가지 않겠다. 다른 구단과 만날 필요가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일본 프로야구 사무국에서 해태와의 교섭권만을 인정하는 상황이었으나 선수 본인이 "싫다"고 버티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김성길은 '삼성'이라고 팀을 지정해 그 팀이 아니면 안 가겠다고 버텼다. 결국 이상국 과장과 박정일 코치는 빈손으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성길 스카우트가 뜻대로 안되자 해태 박건배 회장은 6월 3일 다시 "아무래도 삼성에 양보해야겠다. 우리는 한국시리즈 우승도 몇번씩 했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물러서주는 게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 같다"는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알아서 하세요"라고 한 뒤 메이저리그의 피터 위버로스 커미셔너를 만나기 위해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6월 7일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삼성 이종기 사장이 사무총장께서 연락을 해주시길 기다리고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호텔에 체크인 한 뒤 곧바로 이종기 사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이사장은 "김성길과 입단 교섭을 하려는데 일본 사무국에서는 해태에 교섭권이 있다며 공식적인 절차를 다시 밟기를 요구하고 있다. 일본에 연락해 원만한 해결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일본 프로야구 사무국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는 "피터 위버로스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와의 미팅 때문에 사전에 연락을 못해 미안하다. 해태 박건배 회장이 김성길 교섭권을 양보한 상태다. 삼성에서 다시 신분 조회 공문을 보내 절차를 밝도록 하겠다. 한큐 브레이브스에도 그렇게 전하고 상황을 설명해주기 바란다"고 사무국을 설득해 양해를 얻어냈다.

김성길은 이처럼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6월 27일 계약금 5천만원, 연봉 3천5백만원(구단 발표)에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언더핸드 투수인 그는 후기리그부터 바로 실전에 투입됐다. 그러나 한국야구에 적응이 안됐는지 첫 해에는 11경기에 나서 1패 3세이브, 방어율 3.19에 그쳤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격이었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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