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헌신만 하다가 헌신짝 된 나, 어찌 하오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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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받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후배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27세 미혼 여성)미술치료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입니다. 같이 실습 나가는 후배와 코드가 맞지 않아 매우 힘듭니다. 번갈아 진행하는 형식이라 소통이 중요한데 그 후배가 못마땅하기만 하니 스트레스가 큽니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잘못해도 미안하다 말이 없고, 뭘 잘해줘도 고맙다고 하지 않는 겁니다. 마치 내가 자기를 챙기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요. 그리고 공유해야 할 자료도 너무 성의 없이 보냅니다. 그런데도 이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거나 오히려 말꼬리를 잡아 사사건건 따집니다. 이번 학기를 과연 잘 넘길 수 있을까요.

(남 배려 잘 하는 윤교수)마음에 딱 맞는 사람하고만 일하면 인생이 편할 텐데, 어디든 맘에 안 드는 사람이 꼭 존재하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지금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인생이 다 그렇지’라는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사람은 내가 열심히 하면 행복한 일만 생길 것으로 은연중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해도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자기 마음도 통제 못하는 게 사람 아닙니까. 하물며 타인을 내가 원하는 데로 끌고 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원래 인생이 이런 겁니다.

늘 받기만 해 상대의 배려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을 만나면 피곤한 이유는 항상 더 달라는 요구를 받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후배는 사연주신 분이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도 모르고 있을 겁니다. 상대를 배려하는 사람은 오히려 내가 배려해도 상대 반응이 시원치 않으면 배려가 부족했나 싶어 더 에너지를 쏟고 그러다 지쳐 버립니다. 마음 에너지가 방전되면 분노와 우울만 남죠.

일단 배려 에너지 펌프를 잠시 잠그라고 권합니다. 에너지가 다시 차 오르면 조금만 퍼 주세요. 그런데도 상대 반응이 신통치 않다면 아주 기본적인 에너지 이상은 사용하지 마세요. 상대가 나에게 줄 때까지 기다리는 배짱이 때론 필요합니다.

02 다 줬는데 배신한 남자친구

돌이켜보니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닙니다. 남자를 사귈 때도 그런 적이 많아요. 정말 사랑한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면도 이해하고 보듬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언젠가 남자친구도 이런 내 마음을 알고 나를 더 사랑하게 될 거라 믿으면서요. 그런데 오히려 배신만 당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3년간 사귀다 최근 헤어진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그 사람 입장에서 뭐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갑자기 약속을 바꿔도 섭섭한 티도 안 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몰래 클럽 다니고 심지어 양다리까지 걸치고 있더군요. 형식상 내가 찼지만 이건 차인 것보다 더 마음이 더럽습니다. 

음, 항상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어왔군요.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천사 같은 사람이 갑자기 이기적 행동을 하고 화를 내거나,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당황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나 싶다가 위선자라 단정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도덕적 행동을 한 후 오히려 일탈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사이언스’에 발표됐습니다. 성인 1252명을 대상으로 하루 다섯 번 자기 행동을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선행이나 불친절한 행위를 하거나 당하면 스마트폰에 기록한 후 문자로 알리도록 했습니다. 실험실이 아니라 실제 일상 생활에서 실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 결과 친절이나 선행을 받은 사람은 당일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 10%포인트 더 선행을 베푼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긍정적 감정이 전염 효과를 일으켜 타인에게 긍정적인 행동을 하도록 한 것이죠. 흥미로운 건 선행이나 친절을 베푼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비도덕적이거나 불친절한 행위를 한 빈도가 3%포인트 높았습니다. 연구자들은 선행을 했다는 도덕적 우월감이 도덕성을 오히려 해친 것으로 추측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인든 친절한 행동이 넘치게 하려면 서로서로 친절을 전염시켜야 하겠죠. 반대로 누군가를 친절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계속 친절한 행동을 요구하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감성 에너지가 바닥이 나 돌발적으로 이기적 행동이 나올 수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거나 좋은 일 하는 것도 내게 따뜻한 에너지가 차 있어야 가능합니다. 위 연구는 이 에너지가 타인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서도 충전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다른 이를 배려하는 마음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스스로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03 안맞는 사람 맞추려 하지 마세요

배려나 선행이 전염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주변 사람을 전염시키려면 저는 또 여전히 혼자 남을 배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게 아닌가요. 그러다 또 혼자 지치고요. 이 상황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우선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사연을 들어보니 너무 배려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에게 베풀기만 하는 성격은 그만큼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상대에 대한 기대와 기준이 높은 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기준이 높으면 이별 가능성도 그만큼 커지겠죠. 그러니 사회생활을 할 때나 연애할 때 본인과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을 만나면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한 대로 계속 혼자 배려하고 혼자 상처받는 일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막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우선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주변 친구들은 ‘뭘 그렇게 예민하게 생각해, 사람 만날 때 편하게 마음 먹어’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이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성격을 바꾸라는 건데 사람의 기본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꿀 수 없는 걸 바꾸려고 에너지를 쓰면 더 지치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자친구에 한정해 얘기하자면 상대를 만난 후 그 사람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대신 차라리 그 에너지를 본인과 잘 맞는 사람을 찾는 데 먼저 쓰세요. 내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먼저 배려해줄 사람을 신중하게 고르라는 겁니다. 사랑을 잘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방이 정말 나에게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인지, 그리고 나랑 맞는 존재인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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