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빵 값 1만배 '속죄의 기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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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처기업가 윤석진(왼쪽)씨가 아주대병원 원장실에서 홍창호 원장에게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아주대 병원 제공]

"혼자만 알고 묻어두기에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내가 17년 전 훔쳐 먹은 빵을 어려운 사람에게 1만 배로 되돌려 주고 싶습니다."

24일 오전 11시10분. 경기도 수원시 우만동 아주대병원 홍창호 원장실.

가냘프고 앳돼 뵈는 30대 남자가 찾아와 불쑥 돈 봉투를 내밀었다. 1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이 남자는 수원에서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윤석진(32)씨였다. 쑥스러워하는 남편과 같이 온 아내(이민영.32)와 두 살배기 딸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윤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돈이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써 주세요"라고 말했다.

윤씨가 불우 환자들을 위해 거금을 선뜻 기증한 사연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원 북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8년 가을이었다. 가난한 집안의 2남 중 막내로 태어난 윤씨는 수원시 영화동 2층 상가주택 옥상의 두 평 남짓한 창고를 개조한 옥탑방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다.

굶기를 밥 먹듯 했다. 당시 옥상에는 윤씨네 말고도 같은 처지의 다른 가족이 있었다. 어느 날 옆집 옥탑방의 열린 문틈으로 지금 돈으로 한개 500원쯤 하는 곰보빵 두 개가 밥상 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욕심이 생겼다. 뛰어 들어가 빵을 집어든 그는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아마 그 집 애들이 밥 대신 먹으려 했던 빵 같아요. 그 빵을 먹는 동안 왜 그리 무서웠고, 먹고난 뒤에는 왜 눈물이 그렇게 났던지…."

이때 윤씨는 "언젠가 성공하면 꼭 용서를 빌고 천 배, 만 배로 빚을 갚겠다"고 눈물을 삼키며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빚을 갚을 수 없었다. 빵을 먹은 지 한 달쯤 지나 빵이 있던 옥탑방의 가족 네 명 모두가 교통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이후 윤씨는 "형, 오빠"라고 부르며 자신을 따르던 두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계속 악몽에 시달려 왔다.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윤씨는 2002년 수원에서 PC방 가맹점 업체인 '메트로(METRO)'를 설립한 뒤 성장을 거듭, 현재 직원 80여 명을 둔 중견업체의 대표가 됐다.

경제적인 안정을 얻은 그는 간접적이나마 17년 전 빚을 갚을 방법을 찾다가 이번에 수술비를 기증하게 됐다. 이뿐만 아니라 어려서 세상을 떠난 옆집 동생들의 이름으로 장학회도 설립하기로 했다.

홍창호 아주대병원장은 "성금으로 가정형편이 어려운 행려 환자나 무의탁 노인, 소년소녀 가장을 수술해 주고 그 결과도 전해 주겠다"며 "30대 젊은 사람의 아름다운 생각이 놀랍다"고 말했다.

수원=정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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