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국내 첫 여성 아이스하키 심판 이태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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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리씨가 빙상장에서 한 장애우의 자세를 바로잡아주고 있다. 강정현 기자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표정도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격렬하게 화를 내고 울었다. 정신지체장애라는 것을 말로만 들어 봤던 빙상인 이태리(26)씨는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감정을 지배하는 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스케이트 날이 얼음판을 스칠 때의 매끄러운 감각에 아이들이 색다른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이씨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고 답답한 한 시간여 첫 수업에서 그것이 큰 위로가 됐다. 그리고 정신지체 장애우에 대한 피겨 스케이팅 지도 봉사를 2년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이 됐다.

"지금도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일단 빙판에 서면 제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힘든 건 사실이지만 아이들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씨가 다운증후군.자폐증.정서장애 및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피겨 스케이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2003년 5월. 서울 하계동의 동천실내빙상장이 문을 연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빙상장은 장애인 교육기관인 동천학교재단이 운영한다.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사무를 봐주던 이씨에게 동천학교 측에서 "장애우들에게 스케이트를 지도해 주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고, 이씨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씨는 초등학생 때 피겨 스케이팅에 입문해 연세대 2학년 때(1999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국가대표 2진인 상비군에도 몸담았던 그였으나 스케이트화의 끈조차 혼자 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스케이팅을 가르치고 음악에 맞춰 연기까지 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폐증으로 공격성이 심한 학생이 제 머리채를 잡고 덤벼들 때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일을 중간에 포기할 수는 없었죠. 그 학생은 스케이팅을 배운 이후 공격성이 거의 사라졌어요. 부모님이 얼마나 감격스러워 했는 지 몰라요."

2003년 국내 최초의 여성 아이스하키 심판이 된 그는 올 초 국제심판 자격을 따내는 등 활동영역을 넓혀가면서도 한 주에 두 번 혹은 세 번씩 하는 장애우 지도는 거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길러낸 제자는 10여 명.

이씨는 지난 3월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정신지체장애인 특수올림픽에 자신의 제자들로 구성한 선수단을 이끌고 출전해 금.은.동메달 한개씩을 따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이 올림픽은 정신지체장애인들이 출전하는 대회로 4년에 한번씩 열린다. 빙상 분야에서 한국 선수들이 입상을 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동메달을 따낸 소희(윤소희.19)는 상대적으로 장애 정도가 심해 기대도 안했었지요. 그러나 소희는 정확하고 깔끔한 연기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도와 준다면 장애우 모두가 소희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왕희수 기자 <goman@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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