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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 뒷걸음이 담뱃값 탓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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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2002년 8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고(故) 이주일(본명 정주일)씨는 TV 광고에서 호소했다. "담배 맛있습니까. 저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습니다…. 담배는 가정을 파괴합니다. 끊으십시오."

코에 고무호스를 꽂은 그의 모습은 국민의 심금을 울렸고 금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이씨가 '건강의 독약'으로 지목했던 담배가 3년이 지난 지금에는 '경제성장의 독약'으로 몰렸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요즘의 보릿고개를 초래한 범인이 됐다. 지난해 말 담뱃값을 500원 올린 게 올해 1분기의 성장률을 0.4%포인트나 낮췄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1분기 국내총생산(GDP) 자료)

"담뱃값 인상을 두고 사재기가 심했고 그래서 1분기에 담배 생산이 52%나 줄면서 GDP를 갉아먹었다"는 논리다.

재경부도 같은 생각이다. 한덕수 부총리는 최근 "담뱃값 인상이 GDP 성장에는 마이너스 효과가 있겠으나 지난해와 달리 사재기 등 문제들이 올해 안에 소화돼 올해 전체를 따져 성장에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내내 담뱃값 인상을 반대해 왔던 경제부처가 이제는 담배를 경제난의 주범으로 몰고 있는 듯하다.

정말 담배가 주범일까. 한 발 물러서 보자. 한은 논리대로라면 지난해는 사재기 열풍 때문에 GDP가 올라갔을 게다. 그런데 이 말은 하지 않는다.

담뱃값이 올라 생산이 줄기도 했지만 성인 남자 10명 중 1명이 담배를 끊었다. 흡연자가 줄면 암에 덜 걸리고 생산성 손실이 줄면서 연간 1조원가량 이익이 생긴다.

소비자들이 담배 살 돈을 다른 생산적인 재화를 사는 데 쓰고 정부는 늘어난 담배세금을 다른 데 투자함으로써 연간 2조원의 GDP 증대 효과가 발생한다.

연간 641억원가량의 담배 생산이 줄고 단기적으로 물가가 올라가기도 하지만 나라 전체로 봐서는 득이 훨씬 많다.

독일.프랑스.미국.일본 등 선진국들도 최근 몇 년 사이에 담뱃값을 올렸다. 프랑스는 2003~2006년에 두 배로 인상한다. 이런 나라들이 담뱃값 인상을 성장률 악화의 주범으로 몰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프랑스.룩셈부르크.벨기에는 담배를 물가지수 지표에서 뺐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흡연율이 가장 높다. 성인 남성의 절반 이상(52.2%)이 담배를 피운다. 그 때문에 매년 4만6000여 명이 담배 때문에 암이나 뇌.심장 질환으로 죽는다. 가족들의 경제적.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저소득층은 치료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이런 손실이 10조원이란다.

GDP는 국내에서 생긴 재화와 용역의 순가치를 생산 측면에서 합한 개념이다. 재화나 용역의 가치를 따지지 않는다. 가령 마약 생산이 줄더라도 GDP는 감소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1991년 유조선 엑손 발데즈호가 알래스카에서 기름을 유출한 사고도 GDP를 올린다. 기름을 제거하느라 사람들이 몰리면서 그 지역 상권이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부는 GDP에서 환경파괴 비용을 제한 '녹색 GDP'를 도입하려 한다.

성장률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일관성 없는 부동산 정책으로 인한 건설산업 위축이 대표적이다. 실정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담배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음험한' 기도가 엿보인다. 경제부처의 논리는 국민이 담배를 많이 피워 병에 많이 걸려야 GDP가 올라간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31일은 세계 금연의 날이다. 국민에게 병을 권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담배 없는 '건강 GDP'를 만들어볼 것을 제안한다. 3년 전 이주일씨가 던진 메시지도 이런 것일 게다.

신성식 정책사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