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순간에 아름답게 탄생한 ‘햄릿’의 연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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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호 16면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1852) 부분. 출처=구글아트프로젝트

“비애와 번민, 고통과 지옥까지도 누이는 매력으로, 멋으로 바꾸는구나.”

이진숙의 접속! 미술과 문학 <2> 셰익스피어 『햄릿』 vs 존 밀레이 ‘오필리아’

햄릿에게 버림받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실성한 오필리아. 그녀를 바라보던 오빠 레어티즈의 입에서 나온 탄식이다. 실성한 모습조차도 아름다웠던 오필리아는 물에 빠져 삶을 마감한다. 그녀의 장례식, 한동안 오필리아에게 냉랭했던 약혼자 햄릿은 무덤에 뛰어들며 격하게 슬픔을 표한 끝에 레어티즈에게 용서를 구한다.

“여보게, 날 용서하게…. 그건 햄릿 짓이 아니라고 햄릿은 부인하네, 그럼 누가 했지? 그의 광기야. 그렇다면 햄릿은 피해를 입은 쪽에 속하는 거지.”

햄릿이 늘어놓는 것은 문학사에 유례가 드문 놀라운 궤변이다. 모든 잘못은 햄릿의 ‘광기’에 있는데, 중요한 것은 햄릿의 ‘광기’는 햄릿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여러 사람의 운명을 파국으로 몰아넣은 이 극의 주인공은 햄릿인가, ‘또는’ 햄릿의 광기인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접속사 ‘또는’이다. 이 접속사는 전혀 상관없는 상반된 두 문장을 결합시키고, 충돌을 일으키고, 주인공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 유명한 햄릿의 대사, “To be, or Not to be?”는 완결된 것이 아니라 열린 문장이다. Be 동사 다음에 존재하는 어떤 형용사도 올 수 있으며, 구문 자체는 여러 동사로 대체 가능하다. “To do, or Not to do?”, “To have, or Not to have?”….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사들이 이 문장 안에 들어가 짝을 이루는 순간, 모든 것은 불분명하고 모호해진 동시에 고뇌는 폭발적으로 증폭된다.

이 문장의 구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햄릿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답 없는 질문의 연속. 이것이 가련한 햄릿의 운명이었다.

부정적인 단어가 긍정의 의미를 갖게 되다
‘햄릿’이 초연된 것은 1601년. 문화사적으로는 바로크 시대라 불리는 17세기가 시작되던 때다. 17세기는 한 세기에 걸친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의 충돌 끝에 ‘의혹과 불안’이라는 시대의 질병이 번져가는 가운데 고독한 ‘개인’이 탄생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의 질병에 감염된 초창기 문학적 인물이 바로 햄릿이다. 흔히 비난받는 햄릿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이 질병의 대표적인 증세다.

‘의혹과 불안’의 시대, 접속사 ‘or’는 상식의 안온한 세계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는다. 슬퍼야 할 장례식은 기쁘지 않은 혼례식이 되었고, 기뻐야 할 혼례식은 슬픈 장례식이 되었다.

“약한 자여, 네 이름은 여자로다”라는 유명한 햄릿의 탄식도 이런 과정에서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바로 다름 아닌 욕정에 빠진 햄릿의 어머니이자 순식간에 숙모가 된 거트루드 왕비. 왕비는 그토록 선왕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장례식이 끝난 지 한 달도 안되어 남편의 동생과 결혼을 했다. 전통적으로 헌신과 사랑의 화신인 어머니가 한낱 ‘여자’가 되어 햄릿의 안위도 위협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햄릿의 질책으로 왕비의 영혼은 되돌려졌지만 그 순간 커튼 뒤에서 엿듣던 사람을 칼로 치는데 그게 바로 오필리아의 아버지였다. 왕비가 정신을 차리자 오필리아가 이성을 잃을 차례가 된 셈이다. 행복한 신부의 부케가 되어야 할 꽃은 미친 여자가 넋두리하며 따 모은 정신없는 꽃다발이 되었고, 결혼식에 뿌려졌어야 할 꽃은 무덤에 뿌려졌다.

‘햄릿’ 이전에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진실한 것은 선한 것이었고 동시에 아름다운 것이었다. 진, 선, 미의 가치는 공고한 결합 속에 있었다. 그러나 ‘햄릿’에서 이 가치들은 처음으로 균열의 조짐을 보인다. 글머리에 인용한 레어티즈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비애와 번민, 고통과 지옥’ 같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감정들이 슬며시 ‘매력’ ‘멋’과 손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필리아, 죽음의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19세기 말에 이런 가치전도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햄릿’이 초연되고 나서 250년쯤 지난 뒤에야 이 문장은 의미심장한 이미지를 얻었다. 그림 속에서의 가치전도는 상상한 것보다 더 깊었다.

존 밀레이가 그린 것은 물에 빠져 죽은 오필리아. 그녀가 빠진 늪의 축축하고 습한 공기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섬세한 필치로 작품은 완성됐다. 밀레이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와 더불어 대표적인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s) 화가다. 이들은 기교적 완벽함에 도달했던 라파엘 이전의 미학으로 돌아가 순수함을 되찾고자 했는데, 이는 급격하게 진행되는 산업화와 그에 따른 물질주의의 전횡에 대한 예술적인 저항이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 그들의 마음은 그곳(16세기 이전)에 속했는지 모르나, 몸은 이곳(19세기 후반)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라파엘 이전 순수의 시대의 표상으로 단테적인 여성상을 꿈꿨다. 이 여성들은 지상에 속하지 않는 천상의 존재인데, 이들이 가진 비물질성, 비세속성은 어쩐지 숭고한 영적인 차원으로 고양되지 못하고 ‘병적인 관능성’을 지닌, 그래서 ‘더욱 육체적인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고 만다.

깊고 축축한 늪에 빠진 오필리아는 관에 누운 듯 더딘 물살에 몸을 맡기고 있다. 부동의 자세는 죽음을 암시하지만, 그녀의 벌어진 입은 지금도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살아 있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실족사인지 자살인지 죽음의 원인도 모호하다.

그런데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오필리아는 ‘시체애’라는 단어를 연상시킬 만큼 아름다웠다. 햄릿의 광기가 햄릿이 아니듯, 오필리아의 광기는 오필리아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광기로 인해 오필리아는 죽음을 맞이했고, 죽음의 순간 오필리아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림이 되었다.

햄릿과 레어티즈는 오필리아의 무덤에 뛰어들겠다며 난투극을 벌인다. 죽음과 사랑, 매혹과 절망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무덤이었다. 라파엘 전파 이후 19세 말 데카당스 시절은 죽음과 손을 잡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며, 진선미(眞善美)의 공고한 결합은 결정적으로 파괴된다.

존재는 이제 단일한 문장, 명약관화한 전통적인 문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햄릿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며 선택에 부딪혀야 되고 ‘내’가 아닌 ‘나의’ 여러 속성을 설명해야 한다. 유행가 가사대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다.”

이제 단순히 설명되지 않는 ‘나’를 찾는 여행이 문학의 과제가 된다. 결국 우리가 흔히 듣는 이야기는 “너다운 사람이 되라(Be yourself)”다. 이 말은 슈퍼맨이 지구를 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철학적, 생활실천적 명제다. 오늘도 우리는 햄릿처럼 선택의 문 앞에 서있다. 더 읽을 것인가? 그만 읽을 것인가? 휴~.


이진숙 문학과 미술을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각 시대의 문화사 속 인간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 『위대한 미술책』『미술의 빅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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