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 벌집' 만들기 20년 … "내 연구는 순수 국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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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룡 기초과학연구원(IBS) 단장은 화학산업의 촉매로 쓰이는 메조 다공성(多孔性) 물질 합성의 대가다. 유 단장이 대전 KAIST 연구실에서 벌집을 닮은 제올라이트 분자모형을 들여다보고 있다. [대전=프리랜서 김성태]

“이것은 왕다바리 집, 저쪽에 뱀 허물처럼 보이는 것은 쌍살벌 집이에요.”

 대전 KAIST의 유룡 IBS 연구단장 실험실. 25일 톰슨로이터가 한국인 최초의 노벨화학상 수상 예상자로 꼽은 그의 실험실에는 바짝 마른 벌집이 여러 개 있었다. 유 단장은 “학교 곳곳에 매달린 것을 직접 따 모은 것”이라고 말했다. “놔두면 사람을 쏠 수도 있지 않나. 여긴 나 말고 이런 것을 딸 줄 아는 사람이 없다. 나야 어릴 때 장수말벌도 맨손으로 잡아봤지만….”

 유 단장의 말처럼 그는 KAIST 내에서도 보기 드문 ‘깡촌’ 출신이다. 경기도 화성의 고향집에는 그가 대학(서울대 공업화학과)에 입학하고 2년 뒤에야 전기가 들어왔다. 공부는 등잔불을 밝히고 했다.

고등학교(수원고) 땐 “법대에 가라”는 부모님 말씀에 문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독학으로 본고사를 준비해 대학은 이과에 진학했다. 생물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취직이 쉽다는 공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부모님의 뜻이었다. 졸업한 뒤에는 비료공장에 취직하려 했다. 과학자를 꿈꾸게 된 것은 학비를 면제해주고 병역 혜택을 준다기에 한국과학원( 현 KAIST의 전신)에 진학하면서부터다.

 벌집이 그에게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유 단장은 석유화학 공정 등에 촉매로 쓰이는 미세 다공성(多孔性) 물질을 만든다. 표면·내부에 나노(㎚·1㎚=10억 분의 1m) 크기 구멍이 촘촘히 뚫린 물질이다. 분자 구조가 꼭 벌집을 닮았다. 그에게 벌집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각별한 대상인 셈이다. 그 벌집을 앞에 놓고 노벨상 수상 예상자로 꼽힌 소감을 물었다.

 “지난주 유럽 출장길에 처음 소식을 들었다. 개인적인 기쁨보다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제 규모(2013년 GDP 기준 경제 규모)는 세계 14위지만 기초과학 수준은 30위권이다. 일본이 16명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동안 한국은 수상자는커녕 후보명단에도 끼지 못했다. 유 단장은 “이번에 한국 과학자도 노벨상을 받을 만한 수준에는 올랐다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것 아니냐. 실제로 상을 받든 못 받든 우리 사회가 ‘노벨상 콤플렉스’를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금속 나노 입자를 이용한 촉매현상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귀국한 뒤에는 무기화합물 합성에 매달렸다. 1993년 일본에서 열린 학회에 갔다가 메조(meso·중간, 2~50㎚ 크기) 다공성 물질을 처음 접하면서부터다. 이번에 그와 함께 노벨상 후보로 뽑힌 사우디아라비아 석유회사 아람코의 최고기술책임자(CTO) 찰스 크레스지가 합성한 제올라이트였다.

 제올라이트는 모래의 주성분인 실리카와 알루미늄으로 이루어진 결정성 광물이다.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무수히 많이 뚫려 있는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원유 에 넣으면 구멍 사이로 분자가 드나들며 가솔린·디젤 등의 분리가 빨라진다. 하지만 구멍이 워낙 작아 분자 크기가 작은 물질의 촉매로 밖에 쓸 수 없는 것이 단점으로 꼽힌다. 한데 크레스지가 메조 다공성 제올라이트를 합성해 이런 한계를 극복했다는 것이다.

유 단장은 실물을 구해보려 애썼지만 실패했다. 그때 그의 ‘촌놈 기질’이 발동했다. ‘구하기 힘들면 내가 직접 만들면 되지’라고 생각한 유 단장은 그 후 20년간 다공성 물질 만들기에만 매달렸다.

 99년 세계 최초로 메조 나노 구멍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탄소(CMK)를 합성했다. 2009년에는 구멍 벽면에까지 구멍이 촘촘히 뚫린 제올라이트를 만들었다. 크레스지가 만든 제올라이트는 표면에만 구멍이 있었다. 구멍 벽은 원자가 불규칙하게 배열된 비정질(非晶質)이었다. 이 때문에 촉매효과를 높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2011년에는 크고 작은 나노 구멍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제올라이트도 만들었다. 그만큼 분자 흐름이 빨라져 더 강한 촉매효과를 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과학저널인 ‘네이처’와 ‘사이언스’ 등에 잇따라 소개됐다.

  그는 자신의 이런 연구가 “ 미국에서 배워온 것이 아니라 순수 국산”이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배우지 않은 것을 독학으로 연구해 성과를 냈다는 이유다.

그가 실제로 노벨상을 탈 수 있을까. “가능성을 확인했으니 조금만 더 지원해 주면 앞으로 나 말고도 2명, 3명 후보가 계속 늘어날 거다. 그러다 보면 10년 내에 그중 누군가 진짜 상을 받지 않겠나.” 유 단장은 담담히 말했다.

대전=김한별 기자

◆유룡 단장 =1955년생, 86년 KAIST 화학과 교수, 2005년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 2007년 국가과학자, 2008년 KAIST 특훈교수, 호암과학상, 2012년 IBS연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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