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신문 보기-1997년 9월 11일 10면] '워싱턴포스트' 이끈 여장부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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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9월 11일 중앙일보 10면 광고에는 한 여인의 자서전이 실려 있다. 연륜이 묻어나는 얼굴. 언뜻 보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닮았다. 1960년대부터 30여 년간 ‘워싱턴포스트(WP)’지를 이끈 여성 캐서린 그레이엄(1917.6.16 ~ 2001.7.17)이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WP 신문 발행인이자 출판인, 거대 미디어 그룹 대표를 역임한 최초의 여성이다. 그가 경영을 맡으면서 WP는 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신문으로 성장했다. 정치적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정론직필을 실행한 결과였다. 결국 WP는 1970년대 초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표되는 닉슨 정부의 비리를 보도하며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그레이엄家의 딸, 신문사를 일구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1917년 전 세계은행 총재인 유진 메이어의 딸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다. 유진 메이어는 성공적인 투자 전략으로 막대한 부를 이루고 미국 정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재벌이다. 1933년 유진 메이어는 WP를 경매로 헐값에 사들였다. 아버지는 회사를 이끌어줄 것을 권유했지만 캐서린은 거절했다. 캐서린은 대신 샌프란시스코의 한 작은 신문사에서 수습기자로 일했다. ‘온실 속 화초’로 자란 그에게 사회의 부조리와 하층민들의 삶은 또 다른 시선을 갖게 했다. 그는 부두 노동자들과 독한 술을 나눠 마시며 노조 문제를 취재했다.

이후 WP에 입사한 캐서린은 청년 필립 그레이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결혼 후 그는 일을 접고 한 남자의 아내로 네 아이의 어머니로 살았다. WP의 대표가 된 남편은 정계진출을 꿈꿨고 캐서린은 그런 남편을 내조하는 데 힘썼지만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은 자사의 여기자와 바람을 피웠고 조울증에 시달리다 엽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고 자살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결혼 23년 만에 사회로 떠밀려 나왔다. WP의 미래가 그의 손에 달린 순간이었다.

운명의 ‘워터게이트’ 사건, 역사 속으로

1년 후인 1972년 6월, 워싱턴 워터게이트 건물에서 절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경찰기자였던 WP의 우드워드는 범인들이 민주당전국위원회에 설치했던 도청장치를 교체하기 위해 침입한 것을 알아냈다. 도청을 하던 주체는 놀랍게도 닉슨대통령이었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이를 바로 보도했다. 닉슨 정부는 워싱턴포스트지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압박과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3년 공방 끝에 닉슨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테이프가 공개되며 언론의 승리로 끝이 났다. WP는 퓰리처상을 받게 되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으로 우뚝 서게 된다.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은 언론의 승리였다.

캐서린 그레이엄은 1991년 30년 만에 경영권을 아들 도널드 그레이엄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당시 WP의 매출액은 14억 달러가 넘었다. 그가 처음 경영에 참여했을 때(매출액 1억 달러)보다 14배나 뛴 액수다.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서도 사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AP통신의 이사로 명성을 날리는가 하면 미 신문발행인협회장, 광고주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파란만장한 그의 삶은 2001년 긴 여정을 마쳤다.

그레이엄家, 81년만에 WP와 작별

오는 10월 캐서린 그레이엄의 손녀 캐서린 웨이머스(48)가 WP 발행인 자리에서 물러난다. 수많은 특종을 터뜨리며 뉴욕타임스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해온 WP는 지난해 8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닷컴에 2억5000만달러(약 2500억원)에 매각됐다. 1933년부터 인연을 맺어온 WP와 그레이엄家가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하지만 WP가 일궈온 ‘언론의 자유’는 역사 속에서 길이 남을 것이다.

이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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