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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7)제75화 패션 50년(28)-한일친선 패션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957년 최초의 발표회를 가진 이래 나는 해마다 한두차례이상 패션쇼를 열어 왔었다.
그러나 1963년 초여름 서울과 동경에서 함께 가진 한일 친선 패션쇼 참가는 내개인에게는 물론 한국패션계로서도 여러가지 의미에서 기억할말한 행사였다.
요즘은 흔한것이 자체상품 PR를 위해 직물회사가 주관하거나 후원하는 패션쇼들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볼때 63년의 한일친선패션쇼는 옷감메이커가 주최한 한국최초의 패션쇼라 할수 있다.
이렇듯 메이커주최 패션쇼의 효시를 이룬 업체가 우리나라 기업아닌 일본의 섬유업체인 데이진이었는데 그들의 새제품 테토론을 우리나라에도 선전하기위해 기획된것이 바로 이 친선 패션쇼였다.
동기야 어떠했든 이 쇼가 한국패션계에 미친 영항을 따져보자면 우선 스폰서가 없으므로 이 쇼의의상 제작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한국 패션사상 최초로 디자인료라는 것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뿐아니라 그때까지 한국에서 열려온 크고 작은 패션쇼가 의상디자인에서 발표회 진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디자이너 본인에의해 계획되고 집행되어온 것과는 달리 이 한일친선쇼는 전문진행자에의해 이루어졌다.
즉 주최측인 데이진을 대신해서 기획제작을 담당한 것은 주식회사AD(아트디렉팅)센터의 패션 아트디렉터 「이마이·기요시」(금정청)씨였다.
「이마이」씨는 동경에서 두 차례, 서울에서 네 차례등 도합 여섯 번의 쇼를 진행하는 동안 이 행사에 참가한 디자이너들이 의상제작 이의의 다른 집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도록 완벽한 배려를 해주었다.
이를테면 디자이너들이 자의로 자기가 만든 의상을 입을 모델들을 코치하거나 트레이닝 시키는 것에까지 따로 사례를 지불하는등 디자이너들의 시간을 황금처럼 귀히 여기고 깍듯이 대접하는 태도는 퍽 인상적이었다.
앞서도 밝혔듯 이 행사가 테토론을 한국에 선전하기 위한 것인만큼 테토론을 패션소재로 한 쇼의 주제는 우리 고유 한복으로서 현대의상도 주로 한복의 특징을 응용하거나 그 느낌을 살린 것들이었다.
따라서 의상제작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전부 우리 한국여성으로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거나 연구중이던 김순옥·김영숙·김용자·손경자제씨와 나까지 다섯명이었다.
나를 제외한 네분이 일본에서 활동중이었기 때문에 자연 의상제작도 일본에서 했던 반면 나만 서울에서 의뢰받은 10점의 의상을 완성해서 동경발표의 전날인 5월21일 한국측 모델들을 인솔하고 도일했다.
이때 함께간 모델들은 강귀희(제1회 미스코리아) 김의향(영화배우) 손량자(63년도 미스코리아) 정태자(63년도 미스코리아)양등 4명이었고 일본측에서는 재일교포이며 영화 『현해탄은 알고있다』의 여주인공이었던 공미도리양외에 3명의 패션 모델이 참가했다.
이들 모델들에게도 패션 쇼에서 입었던 옷중 한 두가지를 사례조로 선물하는 그 때까지의 한국식관례와는 달리 주최측으로부터 모델료가 지불되었음은 물론이다.
동경에서의 발표회는 22일 하오1시와 4시 두차례에 걸쳐 아까사까(적판) 프린스호텔에서 열렸는데 주일한국대표부 직원들을 비롯한 재일 각국외교관 부인들이 많이 참석해서 성황을 이뤘다.
특히 영친왕부인 방자여사와 영식 구씨내외가 참석해서 이채를 띠었다.
우리 민요와 무용을 막간에 곁들이면서 5부로 나눠 발표된 54점의 작품은 예상 이상으로 일본관객들의 호평과 찬탄을 모았다.
일본의매스컴도 호의적이었는데 요미우리(독하)신문은 『특히 눈에 띄는것은 전통적인 옷을 현대에 알맞도록 어레인지한 개량복으로서 유럽모드에다 한국 의상의 개성을 잃지 앓을 정도로 보조를 맞춘 여러가지 시도가 잘 성공하고있다』고 호평을 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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