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세상사와 너무 비슷해요"|여류 아마 국수 김영 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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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6세의 회사원 김영 양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젊은 여성이다. 위로 오빠 넷과 언니 셋을 둔 막내로 하나 남은 딸을 시집보내려는 부모님의 열화 같은 독촉이 「다소 괴롭다」는 속사정조차 그 또래 처녀들과 다를게 하나도 없다. 그러나 얘기가 바둑에 미치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그녀는 올 3월 제8기 「아마추어 여류국수전」(한국 경제 신문사 주최)에서 당당히 우승한 「여류 국수」인 것이다. 『여고 졸업 (75년) 후 금방 배우기 시작했으니까 햇수로 6년쯤 되었지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고 집에서 부친과 오빠들이 두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다가 저도 모르게 빠져든 것 같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수많은 바둑 팬의 한사람에 지나지 않던 그녀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작년 제7기 「아마추어 여류국수전」에 출전하면서부터.
대회라고는 처음이었는데도 본선 4위를 차지했고, 곧이어 「전국 아마 여류 바둑 대회」 (후지칼라 주최)에서 3위, 「해태배전 아마 여류 바둑 대회」 (부산일보사 주최)에서는 2위를 해 한 걸음씩 정상에 다가섰다.
이 페이스를 그대로 지켜올 3월 「여류 국수」 칭호를 따낸 김양의 공인 실력은 현재 아마 4단. 여성 프로 기사 조영숙·윤희율씨 (초단), 아마 4단 김혜순·서진주씨와 함께 여류기계의 5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바둑을 두다보면 우리네 인생사와 너무도 비슷하다는 걸 느낄 때가 많아요. 모든 것이 한 점에서 시작되는 것도 그렇고 결과를 전혀 점칠 수 없다는 것,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점 한점 인내를 갖고 두어나가면 얼마든지 역전이 가능하다는 것 등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김양이 들려주는 바둑의 또 하나의 매력은 「바둑판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 남녀노소, 연령,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상수는 상수 대접을 해주는게 「바둑의 도」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렇게 얘기하는 김양도 6급 실력의 부친과는 『되도록 대국을 피한다』는 효녀(?)다.
현재 우리 나라의 여성 바둑 인구는 2만∼3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조치훈 명인의 타이를 획득 후 대단한 기세로 늘고 있다.
『어느 기원에 가보아도 이제 여성은 귀한 손님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처음으로 기원 출입을 하던 6년 전, 기인이라도 보는 것 같던 남성들의 눈초리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양의 바둑은 「머리보다는 감각으로 두는」 속기형. 수를 읽을 때 외에는 거의 1분 이내에 돌을 놓는다. 아홉점을 잃더라도 열점을 얻을 수 있으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배짱도 지녀 『스케일이 크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가 가장 어렵게 이겨낸 상대는 역시 전 「여류 국수」인 서진주씨. 올 3월의 제8기 여류국수전의 본선 도전자 결정전에서 세번에 걸쳐 맞붙었는데 시합이 끝나고도 약 한달간은 입맛을 잃고 정신을 못 차렸을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한 대국이었다고 김양은 회고한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어도 바둑판 앞에만 앉으면 바둑 외에 아무 생각도 안 난다는 그는 프로가 된다든지, 바둑 유학을 떠난다든지 하는 거창한 포부에 앞서 『한수 한수 실력을 늘리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펼쳐 보인다.
여류국수가 된 후 팬레터도 심심치 안게 받고 있는데 그 중에는 서신 대국을 주고받는 상대도 있고, 때로는 바둑을 앞세운 핑크 빛 사연도 날아든다고.
『어떻게 하면 바둑을 배울 수 있느냐고 질문하시는 분이 많아요. 그때마다 저는 남들이 두는 바둑을 열심히 관전하라는 얘기를 해드려요. 그래서 일단 이치를 터득하게되면 그때는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바둑 생각만 하게 마련이니까요.』
『미래의 남편 감은 반드시 바둑을 잘 두어야겠다』는 질문에 『잘 두면 좋겠지만 전혀 문외한이라도 상관없어요. 매일 저녁 마주앉아 한수 한수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요』라는 예쁜 대답을 들려준다. <이덕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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