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가난 벗겨 준 전국 최장터널 사북읍 고한리·태백시 유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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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강과 계곡을 건너고 첩첩험산을 가로질러 가지런히 뻗친 두 줄의 레일을 타고 준령 태백산맥을 관통한다.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고한리. 해발 8백40m의 고한역을 통과한 열차가 숨가쁘게 경적을 울리며 산비탈을 오르면 눈 앞에 다가서는 태백의 수문장 정암터널.
태백산맥의 가슴을 꿰뚫고 갈내산·두문동산을 떠받치며 고한과 태백시의 유전을 잇는다. 총길이 4천5백5m. 우리나라 최장의 터널이다.
세계에서 가장 긴 터널은 길이 1만9천8백20m의 심플론트 터널. 1922년 완공된 이 터널은 알프스 산맥을 뚫고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잇고 있다.
열차는 숨을 헐떡이며 터널을 들어선다. 태백산 최고봉에서 지하로 6백24m, 해발표고 8백76m지점인 태백산맥의 심장부를 지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고한에서 유전이나 황지로 나가려면 갈내산에 얽힌 칡덩굴을 헤치며 1백리 산길을 반나절 걸어야 혔어. 때문에 「칡 갈자, 올 내자를 써서 갈내산이라 이름지어진거여.』
옆자리에 앉은 김나송 할아버지(72)는 칡덩굴 헤치느라 손마디에 피가 맺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터널을 통과하는 시간은 단 5분. 고한에서 유전까지 10분이면 도착한다. 『울고 넘던 갈내산』을 기억하는 김 할아버지 입에서 『세상 참 편해졌다』는 말이 실감난다.
정암터널의 역사는 고한선 개통과 함께 시작된다.
고한과 황지를 잇는 개통열차의 첫 기적소리가 울린 것은 73년10월.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고한은 태백산맥이 가로 막혀 동해쪽으로는 발이 묶였던 태백선의 종착역이었다. 때문에 이 지역 일대주민들은 유전·석지·북평 등 동해방면으로 나갈 경우 5시간 이상 기차를 타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태백선→중앙선→영동선이 서로 연결되는 충북의 제천과 경북의 영주를 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고한선의 총 길이는 15㎞.
『비록 길이는 짧지만 우리나라 기술진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이 철도의 건설은 82년간의 한국철도사에 유례없이 어려운 난공사였다』고 당시 공사를 감독했던 철도청 기획주임 정재원씨(44)는 회상한다.
특히 정암터널을 관통하는데 소요된 공사기간은 3년2개월로 국내 최장을 기록한 최악의 난공사였다.
강원도 정선군과 삼척군의 산악지대를 S자형으로 굽이진 고한선에는 형님격인 정암터널외에 아우격인 초막(7백83m) 막수(1백60m)등 크고 작은 터널만 6개소, 고한천·갈내천·세곡천 등 교량만 무려 10개소.
터널과 다리의 길이만 합쳐도 선로 총연장의 절반에 가까운 6천7백60m로 산을 뚫으면 다리를 놓고 또 산을 뚫은 격이었다.
정암터널의 경우 터널의 동쪽입구와 서쪽입구에서 각각 하루평균 6m씩 파고 들어가며 땅두더지 생활을 한지 2년6개월. 숱한 낙반사고의 위험을 극복하고 터널의 중간 지점에서 동과 서가 극적인 상봉을 했을 때의 감동을 정씨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동과 서가 마주 뚫렸을 당시의 터널의 오차는 겨우 9㎝. 『이만한 오차면 외국의 어느 기술진에도 뒤지지 않는 우리 기술진의 개가였다』는 것이 정씨의 자랑.
정암터널이 뚫리기 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터널은 죽령터널(경북 풍기읍←→충북 대강면).
1942년 일본인들이 완성한 것으로 길이는 4천5백m.
정암터널보다 5사가 짧다.
정암터널이 완공단계에 이르렀을 때 총길이는 사실상 죽령터널과 똑같은 4천만백m.
그러나 일본인 기술진에 앞서는 최장의 터널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욕으로 5m를 더 연장시켰다.
『개통식날 유전역을 통과한 열차가 정암터널을 지나 단5분만에 고한역에 도착했을 때 철로변에 늘어선 주민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마치 개선장군 같은 기분이었으니깐요.』
73년10월16일 상오10시. 고한선 개통열차의 핸들을 잡았던 기관사 유정수씨(56)는 56년 기관사 생활에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터널을 빠져 나온 기차는 다시 한번 산모퉁이를 돌아 미끄러지듯 유전역에 닿는다.
유전역은 고한선의 개통으로 신설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지대(해발8백55m)에 위치한 산간역. 『유전 일대는 산등성이 껍질만 벗겨도 석탄이 쏟아지는 흑노다지 땅이여.』
마을주민 이한림씨(62)는 이 지역 일대에서 무진장 쏟아지는 석탄과 고한선의 개통이 이 마을에 부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사북·고한·유전·황지 일대의 탄광에서 쏟아지는 석탄과 시멘트의 수송에 목적을 둔 고한선과 정암터널의 건설은 여객보다 산업선으로서의 구실이 더 크다. 석탄수송능력을 3배로 증가시키는 반면 연간평균 5억여원의 수송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 고한·유전·황지 일대는 주민의 80%가 광업에 종사하고 있다. 가구당 평균 소득은 2백50여만원.
『유전리에서 태어나 쌀 서말먹고 시집가는 처녀 못봤다는 얘기는 이제 옛말』이라며 이씨는 웃는다.
이씨는 태백의 수문장 정암터널은 이 마을에 부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처녀들의 콧대까지를 높여주었다』고 덧붙인다. <고한=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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