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금강산이 보이는 최북단 마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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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금강산이 보인다.
천고의 신비가 어린 단애의 비로봉, 수줍은 새색시처럼 구름 속에 숨었다가 살짝 그 자태를 드러내는 선녀봉이 안타깝게 시야에 아른거린다.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금강산이 보이는 마을. 물빛이 시리도록 푸르러 『명파』라고 했던가.
푸른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선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아스라이 눈앞에 펼쳐지는 해금강. 수면 위에 우뚝우뚝 솟은 수천의 돌기둥이 안개 속에 가린 듯 어슴푸레 윤곽을 드러낸다. 『고향 땅이 눈앞에 있는데 지척이 천리가 돼 버리고 말았지요.』
6·25당시 월남했다는 김무조씨(83)는 실향민의 비애를 이렇게 토로한다.
김씨의 고향은 명파리에서 약4km쯤 떨어진 송현리. 해금강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이다.
『금강산을 바다에 띄워 놓은 것이 해금강이여. 기암절벽이 우뚝우뚝 솟은 것이 무슨 괴조가 하늘로 날아가는 것 같았으니깐….』
김씨는 일제하에 수학여행에서 보았던 해금강의 절경을 잊지 못한다.
김씨의 고향 송현리는 군사분계선 이남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영토. 그러나 군사분계선과 맞닿은 취약 지구여서 민간인 거주가 금지된 곳. 때문에 고향을 눈앞에 두고서도 발이 묶였다.
따라서 명파리는 군사분계선 이남에 민간인이 거주하는 최북단 마을이 된다. 그러나 자유의 마을로 불리는 대성리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대성리는 국방·납세의무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명파리는 민통선과 군사분계선 사이에 위치한 엄연한 남한의 행정구역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동등한 의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민통선을 통과한 후 고갯마루에 서면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 같은 마을. 동구 밖을 가로지르는 계곡의 물살이 차다.
『금강산 계곡에서 시작해 남으로 흐르는 물이지요.』김씨의 귀띔이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면서 주민들이 남과 북으로 분산되어 인적이 끊긴 명파리는 침묵의 땅으로 남았다.
이 마을에 다시 사람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것은 휴전 후 4년이 지난 57년5월17일.
북괴의 만행을 피해 월남했던 54가구 1백70여명의 피난민들이 정부의 지원 아래 이 마을에 이주한 것이다.
57년 이 마을로 이주해 난민 정착 사업의 일선에서 뛰었던 이칠록씨(71)는 당시의 명파리를 『폐허의 적막 강산』이었다고 회상한다.
이씨의 고향은 함경남도 안변군 배화면. 1·4후퇴 때 부인과 딸을 버리고 단신 월남했다.
휴전 이후 『부산·강릉 등지에서 3·8따라지의 설움을 겪다가 한발이라도 고향과 가까운 마을에 살고 싶어 이주했다』고 말한다. 이씨와 함께 제1차로 이주했던 1백70여명의 난민들은 3년 가까이 움막집에 기거하면서 농토를 일구고 집을 세웠다.
맨주먹으로 이 지역 일대 40만평의 농토를 개간한 것이다.
때문에 『폐허의 땅을 비옥한 농토로 바꾸어 놓았다』는 주민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이제 어느 정도 생활 기반이 잡히자 북에 두고 온 처자식 생각이 간절해진다』며 한숨짓는 이칠록씨. 굵게 주름 진 그의 얼굴에서 일제의 암흑기와 해방, 그리고 6·25의 격동기를 살아온 실향민의 비애를 본다.
현재 이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은 1백40가구에 총6백여명. 대부분이 이북에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다.
마을에서 금강산까지 직선거리가 20km, 쾌청한 날씨면 제1봉 비로봉이 손에 잡힐 듯 구름과 안개 낀 자태가 모습을 드러낸다.
『유호사 인경 소리가 들리는 듯하지요. 가을이면 타는 듯 붉은 옷을 입은 금강산은 별칭 풍악이 되어 더욱 망향의 그리움에 떨게 합니다. 붉은 태양을 이고 백운과 청풍을 몰며 나타나는 금강의 웅장한 모습은 그대로 기적입니다.』이씨는 주민 모두가 금강산의 연봉을 보며 망향의 설움을 달랜다고 한다. 『금강산을 보지 않고서 방자하게 천하의 풍광을 논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는다.
명파리 주민들의 주 소득은 쌀 생산. 연평균 4천5백여 가마의 쌀을 생산, 가구당 3백5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이 단위로는 전국 최고 소득 마을로 주민들의 생활은 비교적 넉넉한 편.
그러나 『민통선 북방이라는 지역적인 취약성 때문에 교통 문제·교육 문제 등 애로점이 많다』고 이 마을 이장 이문하씨(51)는 말한다.
지난 75년부터 거진에서 하루3회 왕복하는 시외버스가 유일한 교통 수단이다. 유일한 교육기관인 명파 국민학교의 자랑은 전교생의 탁구 솜씨. 지난해 9월 강원도 소년 체전에 고성군 대표로 참석한 이 학교 탁구팀은 3위의 영광을 안고 금의환향했다. 『빨리 통일이 이룩되어 북한에 있는 어린이들과 탁구 솜씨도 겨루고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도 구경했으면 좋겠어요.』
탁구부원 김경수군(5년)의 통일에 대한 소망이다.
학교 울타리 뒤편 해안선을 따라 꼬불꼬불 이어진 길.
『도보로 1시간만 걸으면 북녘 땅에 이른다』는 양 교감의 말이 실감이 가지 않는다.
학교 운동장 한구석에 3백년 연륜의 노송이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우람하게 서 있다. 이 고장의 옛 얘기를 혼자만 알고 있는 비목처럼.
『쏴』하고 파도를 몰고 오는 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흔들며 북으로 달린다. 해풍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교문을 나서는 꼬마들의 표정이 『명파』처럼 밝고 푸르다. <고성=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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